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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2: 그 때는 내가 대우실업(지금의 주-대우) 신입사원 시절인 1976년. 우리는 그야말로 수출전사로 “ㅈ팽이”칠 때 였다. 하루는 입사 후 45일만에 처음 반나절 휴가(그것도 정전으로)를 받아 쉬었는데 입사 동기들이 나가더니 한,두 시간 후 꾸역꾸역 도로 회사로 들어왔다. 모두 목욕탕엘 갔었다는데 그 뒤엔 어디로 갈지 몰라서….. 당시 대우의 수출 90%를 담당했던 섬유류 수출을 위해 반여동 부산공장에서 근무했다. 우리는 7시 출근, 10 시반 퇴근이었는데 그나마 5시간 정도는 잘 수 있었지만 일반 생산직 사원 만 여명은 집이 변두리인데다 언덕 꼭대기여서 퇴근버스, 출근버스 이동시간을 감안하면 잘 수 있는 시간이 4시간이 채 못 되었다. 그나마 잔업, 철야를 밥 먹듯이 하니 전쟁도 그런 혹독한 전쟁이 없었다. 내가 당시 하는 일은 영업부에서 받은 수출주문을 자재준비부터 제작, 포장, 선적완료될 때까지 품질,납기를 첵크하여 나중에 Claim없도록 수출완료 하는 일이었다. 근데 생산완료 될 즈음에 거래선의 Agent가 품질검사를 하러 서울에서 내려 오는데 이 Agent의 권한이 여간 막강한 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품질에 탈을 잡아 Inspection Certificate에 싸인을 안 하면 Nego 즉 돈을 만들 수 없으니…. 자연히 우리는 검사 후 이들을 접대하는 일까지 맡았고, 그들은 접대를 받는 걸 당연시 했다. 하루는 Agent와 품목검사 후 동래에서 저녁식사를 후히 하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2차로 저 유명한 부산의 홍등가 완월동으로 향했다. 나는 그 당시 결혼 한지 두 개월 남짓한 즈음이라 양심상, 그리고 보건위생상 外入을 할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같이하는 거사에 배신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방에 까지만 들어가는 척 했다가 슬쩍 빠져 나오는 작전을 구사했는데, 그만 지엄한 “통행금지” 시간 즉 12시를 넘겨 버렸다. 정말 둘이 눕기조차 비좁은 방에서 들어온 아가씨를 앉혀 놓고 그 짓은 못하고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통금해제 시간인 새벽 4시가 되기 까지만 기다렸다. 그런데 그 처녀의 신세타령을 주섬주섬 듣는 사이에 어느덧 “측은지심”이 생겼다. 그리고 측은지심이 어느덧 “의협심”으로 변했다. “이 여자를 구하는 방법은?” 그러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누구처럼 “운명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하나의 소우주인 가련한 처녀의 운명이 “오늘 내 손 안에 있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하면 포주에게 칼침을 맞지 않고 이 순진무구한(?) 처녀를 구해내나? 고심을 하다 보니 새벽이 부옇게 밝아졌다. 그 처녀에게 포주에게 진 빚이 얼마냐고 물어본 뒤 나왔다. 우선 거사자금을 구해야 했다. 총무부장을 찾아가 한달 월급 가불해 달라고 했다. 당시 나는 신입사원이었지만 ‘어려운 일도 L 에게 가면 다 풀린다’는 정도로 업무면에서 꽤 명성을 날리던 터라 총무부장은 두말 없이 싸인해 주었다. 다음 동지를 규합해야 했다. 나는 옆 부서에서 근무하던 문리대 64학번인 “허”모 형을 찾았다. 그 형은 나이보다 늦게 입사해 같은 평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30 대 초반에 거의 대머리가 되어 40이 넘어 보였다. ‘형, 이러이러한 연유로 이 처녀를 구해야 하는데 형이 배우 역할 좀 해 주소. 포주 앞에 가면 그 애 외삼촌이라 하고 ‘어느 X부랄 놈이 내 조카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고 방방 뜨소’라 했더니 그 형은 흔쾌히 따라 나섰다. 그 다음은 완월동 조폭을 제압할 권력이 필요했다. 나는 당시 부산지법 배석판사로 부임해 있던 우리 동기 J군을 찾았다. 그리고 그럴싸한 Fiction을 만들어 호소했다. “YK야, 내가 어제 완월동에 피치못해 그 짓하러 갔는데….. 딱 방에 들어서는 아이를 보니 어릴 때 알던 ‘고향처녀’아이가? 내가 이거 보고 눈감고 넘어가면 사람이 아니지……” J군은 “그으래?”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전화기를 돌려(당시는 넘버를 빙글빙글 돌리는 전화였슴) 완월동 파출소장을 호출했다. 국가 공권력을, 그것도 지엄한 사법권력을, 친구의 오입유사행위 뒤치닥 거리를 위해 동원하다니…… 이런 권력남용행위는 지금 잣대로는 ‘탄핵소추” 감이며 나꼼수가 알았으면 연일 나발을 불어댈 중대 사안이지만, 그 당시 J군은 KB-50 동문답게 의리가 모든 법령에 우선한다 생각했슴인지 아니면 내가 “고향처녀”라 하는 바람에 같은 의분을 느꼈는지 바로 파출소장을 호출하여, “내 친구인데 사정 얘기를 잘 듣고 도와주세요”라 했다. 완월동 파출소장은 J에게 거수경례를 부친 뒤 나와 자칭 외삼촌 허형을 자기의 검은 짚차에 태우고 완월동으로 향했다. 내가 짚차 안에서 ‘고향처녀’ 운운 하며 설을 풀자 그는 비실비실 웃기만 했다. 완월동을 갔지만 ‘엊저녁 그 집’을 찾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파출소장이 포주를 불러 이 사람과 같이 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 데려오라고 했다. 포주는 투덜투덜 거리며 옆에 있던 종업원에게 “X양 데려오라”고 했다. 나타난 X양을 보고 파출소장은 내게 “저 아이가 맞느냐’물었고 내가 맞다 하자 포주에게 잘 처리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뒤 사라졌다. 그 뒤 나는 계속 투덜거리는 포주와, 삼촌 연극을 하며 방방 뜨는 허형 사이에서 화장품 값 등 그 처녀의 빚을 정산하고 그 완월동 소굴을 빠져 나왔다. 처녀, 나, 허형 셋이서 자갈치 시장에서 재첩국을 사 먹고 남는 돈은 차비 하라고 처녀에게 주었다. 허형과 둘이서 어딘가 허전한 기분으로 회사로 돌아 오는데 허형이 한 마디 했다. “지욱아, 내가 너니까 시키는 대로 했는데, 아무래도 저 아이 다시 이 바닥으로 돌아올 것 같다……..’ 이 돈키호테같은 객기를 부릴 때 내 나이 26—혈기방장, 천지 모르고 깨춤을 출 나이였다. 근데 지금 북에서 같은 26세의 김정은이 나라를 쥐고 2천만의 목숨을 좌우하고 있다. 더욱 그에게는 핵무기가……. 이게 말이 되는가? STORY 3. 내가 대우에 근무하다 “대봉”그룹에 간 후의 일이다. 나는 사실 대봉으로 옮긴 사흘이 안 되어서 확 깎인 봉급,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직급 등으로 잘 못 옮겼다 후회했지만 그런 생각은 단 며칠 뿐, 회사가 커야, 나도 크고…하는 생각으로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내게 계열사인 S물산에서 전혀 생소한 분야이던 자금담당 과장을 시키는 바람에 처음엔 당혹했다. 당시엔 많은 수출업체들이 ‘생산집하자금’ ‘원자재비축자금’ 등 수출자동융자 제도를 변칙,악용하여 자금을 굴렸는데 대봉도 예외가 아니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나도 변칙자금 운용에 금방 도가 트여 다른 사람보다 더 잔꾀를 내 자금을 만들곤 했다. 그 날은 오전이 잠잠해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오후 2시가 넘어 갑자기 대봉그룹 전체 자금 담당 부장이 전화를 해 ‘오늘 내로 85000 불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부도난다’ 라고 했다. 아무리 재주를 부린다 해도 서류 만들고 어쩌고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있다. 2시부터 서둘러도 서둘러도 은행마감까지 빡빡한 시간이다. 더욱이 ‘부도’라니….. 당시엔 워크아웃이란 단어도 reschedule이란 말도 없던 시절, 부도나면 완전히 사업이 종치는 것이다. 수많은 종업원들의 생계는? 직원들에게 여차여차한 서류를 급히 작성토록 지시한 다음, C은행 본점으로 달려가 외환계, 대부계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원자재 비축확인을 받아야 했다. 비축확인이란 원자재 대장에 기재한 후, L/C 또는 D/A 수출계약서 뒷면에 시퍼런 스탬프를 찍고 네 칸 안에 총비축량, 총소비량, 잔량, 금회 청구량을 숫자로 적어 담당 대리의 빨간 도장을 찍는 걸 말한다. 그런데 그 서류를 내밀자 새로 온 인증계 대리(계장이었는지 기억이 삼삼)가 변칙이라며 확인도장을 거부하는 게 아닌가? 법대로 하자면 그 대리의 말이 맞으니 관행대로 ‘봐주기’를 해 왔다고 주장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 절차가 진행 되어야 Local L/C를 발급받고 그걸 계열사 이름으로 납품서류와 Nego서류를 만들고 그 돈을 찾아 당좌계로…. 등등 물리적 시간계산을 하던 나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는 벽에 걸린 회중시계의 추가 한번 오갈 때마다 내 심장도 같이 쿵쿵 뛰었다. ‘부도’ ‘부도’ ‘부도’ 머리 속이 하얘졌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담당 대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 “P 고무” 사장이라는 사람이 인증계로 와서 같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 사장은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었는데 그 새파란 나이의 인증계 대리는 매몰찬, 거의 반말인 어조로 사장을 모멸하듯 날인을 거절했다. 순간 내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일말의 양심적 자제심이 틈을 내었다. “오냐, 너 이젠 걸렸다. 어디 보자!” 나는 서류를 들고 창구 안 쪽으로 들어가 그 대리 옆에 섰다. 다시 한 번 정중히 날인을 요청했다. 상대방은 한 마디로 거절. “정말 못 찍겠습니까?” “못 찍어요.” “그럼 제가 찍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나는 왼손으로 스탬프에 잉크를 잔뜩 묻힌 다음 그 사람의 머리칼을 오른 손으로 한 웅큼 잡아 목을 뒤로 재친 뒤 얼굴에 이마, 볼, 닥치는 대로 스탬프를 쾅쾅쾅 찍어 버렸다. 이 돌출된 폭력에 은행 2층에 근무하던 행원들이 와르르 몰려왔고, 과장 이상 간부들은 나를 뜯어 말리고 일반 행원들은 그를 뜯어 말렸다. 은행장이 내려오고, 경비들이 뛰어오고….. 평소 안면이 많은 대부계 차장이 나를 지하 다방으로 데려 가더니 “대체 점잖으신 분이 왜 그러시냐?” 고 물었다. 나는 양심에 철판 깔고 내가 무조건 옳다고 우겼다. 그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회사에 가 계시라고 부탁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직원들에게 빨리 은행에 가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그 날 85000 불은 만들어 막았고, 나중에 그 대리와는 화해를 하고 술도 마셨다. 근데 1978~9년 사이에 일어난 이 일로 3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내 행동은 회사를 살리기 위한 거였지만 분명 법대로 하자면 그 행원이 정의의 편이고 나는 불의의 편이었다. 그 행원은 오랜 나쁜 관습을 바꿔보려고, 소신대로 했지만 폭행을 당했고, 또 자기가 직위를 걸고 거부한 정당한 업무행위를 윗 선에서 묵인해 처리해 버렸다. 그가 겪은 좌절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속으로 그가 지금쯤 금융계의 거목이 되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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