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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야기> 금년 가을의 단풍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숨 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고 매말라 타버리듯 황망히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며칠 전에는 27년간이나 내 곁에 있었던 휴대용 전자계산기의 정신이 혼미하게 되어 기어코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낡고 바래고 거칠어진 갈색의 가죽 케이스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니 웬지 마음이 편치 않아 문득 집안을 한번 둘러보니 20~30년 묵은 가재들이 줄줄히 내 눈에 들어와 지나간 세월 속에 나름대로 지켜온 것들이 차츰차츰 의미를 상실해 가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서운해지는 것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은 한 3~4년 만에 어떤 친구의 집에 들렀는데 들어서는 현관에서 어른들의 큰 신발들과 함께 나란히 놓여진,예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단아한 검정색 어린 소녀의 구두를 보고 그간 새로운 변화가 이 집안에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아! 무척이나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하였다. 더더구나 생전 처음으로 본 그 아이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이 집 아들의 어린 시절과 너무나 닮아서 머무르는 동안 잠깐잠깐 마치 안개에 갇힌듯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의 시간축을 잃어버린듯 신비한 기분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것은 마치 분침이 움직이면 시침도 기어코 따라 움직이듯 해맑은 어린 소녀의 존재 자체가 마법의 거울이 되어 나의 현위치를 단순한 숫자 나이의 누적으로서가 아니라 동적으로 방향성을 시사하면서 송두리째 비추어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10월 말경에는 한 15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갑작이 연락이 와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제 곧 만 60 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세월의 자국이 감추려고 하여도 어쩌면 슬픈듯이 들어나 있었으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성격,취향,말과 행동은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서 "사람의 본질은 세월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는 않는구나!"하며 한편으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마 곧 정년이 되어 평생 근무하였던 직장을 떠나려함에 어떤 심정에서 불현듯 내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그가 나 한테서 보고 듣고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략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그동안 정말 열심히 잘 하셨다!","성공하셨다!" 하고 거듭 치하해 주었다. 아마 내가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도 그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었으리라! 아무튼 이번 가을은 특히 공직이나 기업에서 곧 물러나는 친구들이나 친인척 또는 그의 가족들의 무엇인가 불편한 몸놀림이 눈에 들어온다든지 또는 평상시와 다른 이상한 침묵이 나의 주위를 감돌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우리 식구 전부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였던 예순번째 집사람의 생일이 이름 모를 사람이 보내온 꽃 한바구니에 의하여 별안간 알게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그날 나는 무척이나 당황하였다. 잠시 불안하고 어색한 마음을 누르면서 내색을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더니 다행히 별 큰 충격이 없어 보여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는데 원래 피차 간에 생일 같은 것은 별 의미 없는 일로 줄곳 치부하여 왔던 터이라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웬지 이날은 하루 종일 집사람의 거동부리가 마음에 걸려있었다. 다행히 저녁 늦게 이 사실을 안 아들 녀석이 닭튀김 하나와 "아들에게 엄마가 필요한 이유 100가지"라는 책을 한권 사와서 평상시에 살가운 행동이라고는 일체 하지 않는 놈이 그날따라 호들갑을 떨어대다가 안하던 화투 놀이까지에도 가세해주어서 별탈없이 이날을 보내게 되었다. 여자이지만 원래 나보다도 더 굳건한 심성의 소유자이니 앞으로도 세월의 흐름과 이에 따르는 겉모습의 변화에 조금도 흔들리지말고 이 때까지 지나 온 나날처럼 변함없이 굳세게 하루하루 펼쳐나가주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하면서 이번 가을 근처 공원에서 떨어진 낙엽을 함께 밟으면서 한두마디 서로 주고 받았던 레미 드 구르몽(Ramy de Gourmont)의 "낙엽"이란 시의 끝 부분을 소리없이 여러번 되뇌어 주었다. 가까히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히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2009년 11월2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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