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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 촉도는 험준타더니
이름   이범은 등록일   2010-07-07 오후 12: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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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하늘 호수 나그네>

2. 촉도蜀道는 험준타더니

Ⅰ.
정주鄭州역의 플랫폼을 할 일 없이 어슬렁거렸다. 밤 아홉시 반이다. 머리를 짧게 깎은 키가 작달막한 내 연배의 중국인이 웃통은 아예 걸치지도 않고 플랫폼의 중간에서 여유롭게 서있었다. 내가 1995년 여름 처음 중국에 와서 북경 시내를 쏘다니던 당시는 거의 대부분의 하층민이 웃통을 벗고 설쳐댔는데 지금은 드문드문 보여서 오히려 더 신기해 보였다. 물을 사들고 차에 올라와 자리에 누워서는 달리는 어둠 속의 불빛을 무연히 내다보다가 저절로 잠이 들었는가 보다.
덜컹이는 소리에 부스스 잠이 깨었다. 밖은 무슨 역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썰렁해 보이는 플랫폼에 철도원 외에는 인적조차 없었다. 시계에 불을 켜니 3시 반이다. 칸의 다른 사람들이 깰까 저어하여 살며시 문을 열고나와 플랫폼으로 내려오니 이른 새벽이지만 벌써 후덥지근한 기운이 느껴진다. 팻말을 보니 서안으로 바로 옛 장안長安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어둠 속에서나마 역 앞의 거대한 명대 성곽의 윤곽이라도 보고 싶었다. 역을 나서기만 하면 바로 코앞에 다가오는 거대한 성벽은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을 제법이나 위압할 줄 아는 멋진 놈인데! 그러나 역사 안에선 건물로 막혀 전혀 가늠할 길이 없었다.
미련이 자꾸 커져온다. 이곳에서 또 한 번 양귀비를 희롱하며 이백李白과 술 한 잔 나눌 수는 없을까? 아니다. 꾹 참고 사천으로 가자. 거기에도 이백이 있고 두보杜甫가 있으니, 같이 탁문군卓文君의 술집에 가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곡을 듣던지, 아니면 설도가 있는 술집에 가서 그녀의 연하 애인 원진元稹을 불러 더불어 희롱하며 한 잔 하면 될 것 아닌가! 애써 누르며 다시 기차로 올라왔다. 출발하는 차속에서 성의 윤곽이라도 보려고 열심히 내다보았다. 그러나 잠시 스치듯 지나쳐버리는 그 모습을 완전히 잡기가 어려웠다.

Ⅱ.
뒤척이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가? 깨어보니 이미 아침 6시로 날은 훤하게 밝았고, 차는 보계寶鷄역에 정차해 있었다. 보계라! 바로 보물 닭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지명이 재미있었다. 일전에 책을 읽으면서 이 지명의 유래를 읽고는 참 흥미로웠던 기억이 났다.
원래 관중 평원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인 보계의 옛 지명은 진창陳倉이라고 한다. 춘추시대인 B.C. 8세기경 진문공秦文公 때에 이곳의 한 사냥꾼이 사냥을 나가 양과 닮기도 하고 돼지와 닮기도 한 고대 전설 속의 짐승인 경獍이라는 괴수怪獸 한 마리를 잡았다. 그가 이를 진문공에게 바치려고 하자 어린 두 아이가 나타나 만류를 했다. 그 후 경은 태어나면서는 어미젖을 먹으나 조금 크면 사람의 골을 먹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사냥꾼은 서둘러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경이 황급히 ‘당신은 나를 죽이지 말고 곧 풀어주면 두 어린아이를 잡아오겠다. 그들은 용과 봉에서 태어났는데 모두 진보陳寶라고 부른다. 남아는 패자覇者라 불릴 것이고, 여아는 왕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냥꾼은 이 소리를 듣고 신비롭게 여겨 경을 풀어주어 어린 아이들을 잡으러 가게 하였다. 그러자 두 어린아이는 갑자기 두 마리의 신계神鷄로 변하였다. 한 마리는 하남의 남양南陽으로 날아가 약 7백년 후에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로 몸을 바꾸어 태어났고 다른 한 마리는 바로 이곳 진창산 꼭대기로 날아와서 석계石鷄가 되었는데 몸체는 양羊만했고 광채는 마치 옥과 같았다. 사냥꾼이 풀어준 경獍은 석계를 풀을 덮어 지켜주었다. 이때부터 이곳 진창산은 밀림으로 무성해졌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행여나 석계의 복을 바랐으나 묵묵부답이라 태평성세만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이곳 진창산에서 신계 우는 소리가 멀리 십여 리에 걸쳐 울렸다. 이때는 바로 안사安史의 난의 중요한 고비로,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을 갔으며 태자가 봉상부鳳翔府에서 숙종肅宗으로 즉위하여 반군과 싸우던 시기였다. 신계의 우는 소리를 들은 당군唐軍은 이후 승승장구하였고 반군은 지리멸렬의 상태가 되었다. 숙종은 신계를 국보로 삼았고 닭울음소리를 길상의 징조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는 진창을 보계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머리에 남는 것은 보계의 우리 말 발음이 요상하다는 것이니, 제법 폼 잡은 중국아저씨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그는 서슴없이 3성의 억양을 넣어 “바오지”라고 점잖게 대답할 것이기에.

Ⅲ.
보계서부터 성도까지는 선로가 보성선寶成線으로 바뀐다. 총연장 669㎞로 335개의 터널과 998개의 교량이 있을 만큼 지형이 매우 험한 곳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촉蜀땅의 관문인 양평관陽平關까지는 아직 단선이라고 한다. 기찻길 양옆의 지세와 풍광도 여태와는 달리 많은 차이가 났다. 산세가 웅장하고 협곡이 깊어, 어떤 곳은 터널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강원도 산골을 복사하여 와서 약간 확대시켜 놓은 것 같았다. 기차는 교행을 위해 간이역에서 한참을 서있기를 자주 했으며, 높은 고갯길을 올라갈 때는 힘에 부치는지 뒤로 조금 밀렸다가 다시 앞으로 왈캉 당기기도 했다. 거기에 따라서 내 몸도 따라 흔들거린다. 산골 기차 길옆 오막살이 농가의 모습엔 왠지 모를 정겨움과 연민이 우러난다. 까만 얼굴에 꾀죄죄한 모습으로 넋 놓고 기차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들에게서 기적 소리에도 천진하게 잠을 잘도 자는 우리네 아기들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곳 산골은 그래도 아직은 약간의 순수성이라는 원형이 유지되고 있을 것 같은 정겨움과 동시에 시대에 동떨어져 뒤쳐져가는 그들 생활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이 뒤섞여있는 것은 아닐지?
기차는 진령秦嶺역에서 또 한참을 서있었다. 갑자기 역 구내의 음식 파는 수레꾼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침 식사 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컵라면과 음료수 등등의 먹을거리를 사기위해 제법 부산해졌다. 그 바람에 나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조그마한 쇠스랑처럼 생긴 포크로 열심히 후루룩 거리며 속을 채웠다. 배가 불러오니 더 잘 보이는가 보다. 촉으로 가는 길이 아니랄까봐 옆 선로의 침목과 레일 가에 장비張飛의 장팔사모를 축소해서 여기저기 패잔병의 유해처럼 어지럽게 늘어놓았다. 컵라면을 먹고는 하얀 플라스틱 포크를 아무렇게나 내던져놓은 것이다. 기차 안에 휴지통이 많이 있는데 왜 굳이 내던졌을까? 아마 발 디딜 틈 없는 복잡한 좌석 칸에서 도저히 버릴 곳이 마땅찮아 그랬으려니 생각은 되나 너무나 많이 퍼질러 놓은 것에는 그저 아연해질 뿐이었다.
섬서성陝西省의 끝 마을 약양略陽을 지나 양평관으로 다가가자 산세는 더욱 험준해지면서 터널과 협곡이 서로 바꿔가며 나타나고 그 사이를 기차가 힘겹게 달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에 촉의 관문인 양평관에 이르렀다. 이제부터는 사천이다.
촉 땅에 들어서서도 지세가 천험天險의 땅이라 할 정도로 사방이 높은 산들로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당나라 이백이 한중漢中에서 검각劍閣을 거쳐 고향땅 강유江油로 가면서 지은 명문의 장편시 <촉으로 가는 길은 험하구나!(蜀道難)>에서 읊은 것처럼 하도 산이 높고 험준해서 황학黃鶴도 날아 넘어갈 수 없고 숲이 울창하여 원숭이가 기어오를까봐 걱정스러웠다. 물론 옛 촉도는 여기가 아니라 한중에서 광원 검각의 고잔도를 거쳐 촉의 중심 도시 성도로 이어지는 전장 450여 km의 길로, 천여 년간 중원과 촉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 비교적 수월한 곳을 골라 우회하여 잡은 이 기차 길도 이렇게 험할진대 옛 촉도는 얼마나 험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북위北魏시대의 역도원酈道元이 <수경주水經注>에서 기록한 촉도의 생성 설화를 살펴본다. ‘진혜공秦惠公이 촉을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길을 몰랐다. 그는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들어서 꼬리 밑에 금을 달아 놓고는 금똥을 눈다고 떠들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촉왕은 여러 명의 장정으로 하여금 길을 만들어 이 돌소를 끌고 오게 했다.’ 이 때문에 이 길을 옛날에는 금우도金牛道라 불렀다고 한다. 금똥을 누는 돌소에 탐이 난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촉왕은 스스로 물욕에 눈이 어두워져 이 같은 바보짓을 저질렀으니 당연히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촉도가 통하면 촉국이 멸망한다.’라고 단언하는 역사가들의 말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이백이 느낀 험준함이 내게 더욱 여실히 와 닿는다. 그는 위태로운 산굽이를 올라서면서 겁도 나고 숨도 차서 놀란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리고 가쁜 숨으로 헐떡이며 ‘아이쿠! 아찔하게도 높구나! 촉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로 올라가기보다 더 어렵네.’(噫吁戲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 라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그 험준함에 놀랐으면 ‘촉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로 올라가기보다 더 어렵네!’라며 연거푸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탄식하였을까? 그리고는 ‘성도가 비록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차라리 집으로 어서 돌아가는 것보다 못하다(錦城雖云樂, 不如早還家)’라고 후회(?)마저 했을까? 이처럼 험한 길을 편안하게 눕거니 앉거니 하면서 지나가니 이백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요즘은 다 이렇게 가는 것을 ------. 내 풍류 없음에 괜스레 자위해본다.

Ⅳ.
양평관을 지나면서부터 기차의 선로는 복선이다. 마주 앉아 창밖의 산천을 내다보던 중국인 부부 중 남편인 엄효화嚴曉華씨는 십여 년 전에 자기도 복선화 공사에 참여했다고 자랑이다. 그때 무지하게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그 때문에 편히 다닐 수 있어 좋단다.
날은 계속 부옇게 흐린 가운데 비마저 뿌린다. 이런 바깥을 내다보자 ‘촉견폐일蜀犬吠日’이란 성어가 생각이 났다. ‘사천은 산이 높고 안개가 짙어 해를 보는 날이 드물어 해가 뜨면 오히려 개들이 이상히 여겨 해를 보고 짖는다.’라는 뜻으로 식견이 좁아서 대수롭지 않은 일을 보고도 신기해하는 것을 두고 이 말을 쓴다. 정말이지 사천 땅에 들어서자 험준한 산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또 지독한 안개 속에 비마저 추적추적 내려 침울한 기분이 생기는 것이 이 말을 실감나게 하였다.
계속 산과 협곡 사이를 뚫고 지나가던 기차는 이윽고 누런 흙탕물의 제법 큰 강과 나란히 달린다. 엄씨에게 강 이름을 묻자 가릉강嘉陵江이라고 대답한다. 사천의 곡창지대를 계속 흘러가서 중경重慶에서 장강과 합류하는 바로 그 강의 상류였다.
가릉강을 따라가며 그 펼쳐지는 수려한 경관을 감상하던 중 반대편 강 언덕에 온통 고색창연한 붉은색 기와의 옛 건물군들이 보였다. 나의 궁금증을 눈치 챈 엄씨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천불애千佛崖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곳은 남북조에서 청에 이르기까지 1400여 년간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이루어진 석굴군이다. 약 200여 미터의 절벽위에 원래는 근 이만여 불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7000여 개만 남아있단다.
마침 그때 옆 칸으로 옮겨간 조폭풍의 아저씨가 당찬 폼으로 짐을 챙겨서 가족과 함께 나오고 있었다. 광원이 이제 4km 남았다고 하면서 “당신의 여행길이 순풍처럼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며 작별 인사를 한다. 서로 웃으며 힘찬 악수를 나누었다. 기차는 곧 광원역에 멈춰 섰다. 출발하는 차창 밖으로 그 가족 일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뜬금없이 나도 그들처럼 내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광원은 그 행정구역 내에 검각을 두고 있기에 그들을 따라 내린다면 검각과 고잔도를 두루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기차는 사천 땅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연도의 풍정도 달라져서 산수와 농촌의 정경은 마치 우리네 농촌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다녀 본 중국의 어느 고장보다도 우리와 닮아있어 약간은 정겹기도 했다. 비는 계속하여 뿌려대고 있었지만 농부들은 비를 맞아가며 물길을 내는 둥 열심이었다. 창밖만 내다보는 것도 지겨워졌다.
엄씨와 그의 부인 황흥금黃興琴씨도 무료했던지 나에게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한 번씩 중국책을 꺼내 읽는 것을 본 때문인지 자기들 나름대로 나를 괜찮게 생각한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 갑자기 선반에서 가방을 내리더니 책 몇 권을 꺼낸다. 할머니에게 맡겨둔 두 명의 자기 아이들에게 주려고 상해에서 구입한 아동용 책이었다. 그 책의 뒤표지에 사인을 해 달랜다. 내가 누차 거절했으나 자기 아이들에게 외국인이 쓴 것이라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막무가내 조르는 것이 아닌가. 어쩔 도리가 없어 책에 한글과 중국 간자체의 두 가지 서체를 이용해 사인을 해주었더니 부부가 서로 쳐다보며 대단히 잘 썼다고 하면서 아주 좋아한다. 정말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혹시 시간이 되면 자기 집에 한번 놀러오라고 집 주소까지 써준다. ‘사천성 의빈시 고현 ---’. 나도 주소를 써주고는 호주머니를 뒤져 우리 동전을 몇 개 꺼내 아이들에게 주라고 하니 연신 고맙다며 받아서는 요리조리 돌려보며 기뻐한다.
그러자 이층 침대에 있던 40대 중국 사내도 동전에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거들고 나선다. 자기는 하남 개봉의 공무원으로 사천에 출장을 가는 중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나의 나이를 묻는다. 내가 나이를 말해주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 나이에 혼자 여행하다니 대단하다며, 예의 중국인들이 즐겨하는 스타일대로 신체가 아주 강건하다고 공치사까지 하며 추켜세운다. 나와 3명의 중국인은 밑도 끝도 없는 주제로 대화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호감도도 높았다.

Ⅴ.
기차는 정해진 시간보다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백의 고향 강유로 다가갈 즈음에는 연도에 시멘트 공장이 많이 보였다. 그중 아주 큰 규모의 한 공장은 폐업을 하였는가 보다. 그 주변의 회색도시가 을씨년스러운 것이 마치 몇 해 전의 우리네 탄광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강유에 도착하였다. 이제 이백이 시로 표현한 그 험난하다던 촉도도 끝이 났는가? 이곳에는 이백 기념관과 이백이 다섯 살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살았던 고거故居가 있다고 하지만 다음번의 여정으로 넘겨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애틋하여 밖을 내다보니 여기저기의 조그마한 개울이 마치 모두 노파가 돌을 갈아 놀이꾼 이백을 깨우친 마석계磨石溪인 것처럼 느껴진다. 평화로운 고장이었다. 강유 시내를 벗어날 즈음 고속도로 입구부근에서 소를 먹이던 청년의 표정은 아직도 내 머리에 진하게 각인되어 있다. 천연스러운 그 모습이.
면양綿陽 초입의 나한사羅漢寺는 창밖으로 보기에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엄씨의 말로는 그 안에 매우 큰 와불이 있어 많은 불자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그렇다. 이곳 면양은 중국 선종의 큰 별인 마조馬祖의 고향이 아니던가! 당나라 때 마조가 선종의 큰 인물이 되어 많은 제자와 문도를 거느리고 강서 땅에서 주석하고 있을 당시 고향인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고명한 거물이 왔다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절하고 복을 빌었다. 한창 폼 잡고 있는 마조 앞에 갑자기 벼락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왔다. 한 허름한 옷을 입은 노파가 ‘난 또 누군가 했더니 마가馬家놈 집의 코흘리개 아닌가?’ 하며 큰 소릴 내지른 것이다. 역시 큰 인물은 고향에서는 잘 알아주지 않는가 보다. 예수님도 고향에 가셨을 땐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며 홀대 받았다던데.
2시간이나 연착하여 저녁 7시 50분경에 기차는 덕양德陽역에 정차하였다. 엄씨 부부는 여기 내려서 묵고는 내일 아침에 다시 버스를 일곱 시간여를 타고 의빈에 간단다. 여기서 가는 것이 오히려 성도에서 가는 것보다 가깝고 수월하다면서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제법 어둑해지기 시작한 역의 플랫폼에서 언제 다시 한 번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섭섭함을 달랠 수밖에는. 그러나 곧 집에 가서 귀여운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인지 부부의 발걸음은 무거운 짐에 비해 가벼운 것 같았다.

Ⅵ.
이제 다시 밖은 어둠속에 잠겨버려, 계속 내리는 비속에서 불빛만 초점 없이 퍼지고 있었다. 슬슬 내릴 준비를 했다. 예정보다 두 시간 넘어 밤 8시 50분에 촉도蜀都 성도에 도착하였다. 어느 구석에 숨었다가 꾸역꾸역 나오는지 몰라도 플랫폼에서부터 역사를 벗어날 때까지 내 의사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이리 떠밀리고, 저리 내쳐지고. 그리하여 사람 물결 속에서 같은 칸의 개봉출신 공무원을 중간에서 놓쳐 버렸다. 그가 나에게 그래도 자기가 좀 더 안다고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이렇게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 아쉬웠다. 앞으로 어느 하늘 아래에서 또 볼 수 있겠는가?
이백과는 달리 촉도蜀道를 편안하게 왔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려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성도는 나를 호락호락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으려는가 보다. 어쨌든 비오는 어둡고 복잡한 역 앞에서는 무엇을 가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말했다. “무후사 앞으로 갑시다.”




[나도 한마디]
바오지  니 바오지 하오 마? 듕귁쌀람이 혀는 말..진따이 자와 맨따이 운덩와~ 는 그렇다 치고 모택동을 마오쩌둥, 등소평은 덩샤오핑..중국말 표기법을 언넘이 일케 만들었나? 중국 조선족들이 하는 말.. 우리도 연변이라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죽으라고 옌볜이라 하는지? 옘뱅할~ 2010-07-10 오전 11:10:00 x

봉영  범은이의 해박한 역사지식과 거침없는 한문실력을 바탕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심오한 철학적 고뇌의 뼈다귀에서 우러나온 오묘한 문학적 향기와 소박한 인간미는 마치 백미가 어우러진 해장국처럼 구수한 맛이오만... 2010-07-09 오전 5:20:00 x

오중관  범은이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부러워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방대한 중국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고있니, 다음게시때는 여행시기를 밝혀주면 많은 참고가 될것같애 아아 중국이여 너 알고싶다. 2010-07-08 오전 9:14: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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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촉도는 험준타더니 2010-07-07 이범은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