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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니
이름   이범은 등록일   2010-07-14 오후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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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3.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니

Ⅰ.
성도成都역 앞을 출발한 택시는 캄캄한 어둠 속에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뚫으며 물기 머금은 도심을 잘도 헤쳐 나간다. 낯선 도시는 칙칙한 어둠 속에서 촉촉한 물기로 단장을 하고는 나와 서로 맞선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순간적으로 평소 매파(?)로부터 전해들은 허구한 이야기들이 과대 포장된 것은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무 불시에 쳐들어와서 미처 단장을 못한 것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한 번 더 기대를 갖고 흐려진 창을 통해 연신 밖을 내다보았다.
길거리는 간혹 갈라진 불빛으로 아스팔트가 폐유처럼 번들거리고 있었고 그 위를 물을 튀기며 달리는 차들만 바쁠 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좀체 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막연한 호감을 느끼며 큰 기대를 갖고 있던 나에게 순간 와 닫는 감흥은 오직 ‘담담한 비애’였다. 아! 여기가 바로 삼국지연의에서 유비劉備와 제갈량의 아지트였던, 차가 유명하고 대나무와 꽃이 지천으로 널려있고 그리고 재기 넘치는 여인과 풍류 가득한 시인묵객의 고장 촉蜀의 도읍 성도란 말인가?
밤비는 끊임없이 주룩주룩 내린다. 두보가 <춘야희우春夜喜雨>에서 노래한 것처럼 만약 이 비가 반가운 비라면 내일 아침 이곳 부용성芙蓉城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활짝 필 것이다. 마침 지금은 봄이 아니어서 만개한 연꽃의 꿈이 날아갈지라도 가을비가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이 비가 만일 가을비라면 당 말의 불우한 탐미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이곳 성도 일대를 유람하며 읊은 <야우기북夜雨寄北>에서 ‘파산의 밤비에 가을 못은 물이 넘치네, 어느 때 함께 서창의 촛불심지를 잘라가며 파산의 밤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窓燭, 却話巴山夜雨時]’ 라고 노래한 것처럼 밤하늘은 더욱 애처로움으로 그득할 터인데.
성도는 사천성의 성회省會로 부용성 혹은 금성錦城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옛 촉 땅에 속하는 이 도시는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니, 도시의 서남쪽에서는 지금도 약 4300년 전의 자죽고성紫竹古城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 중이다. 이곳은 신석기시대 유적중의 하나로 중국 문명의 기원에 대한 다원성을 제공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도란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전국 초에 촉왕이 이곳으로 천도하여 “1년 만에 읍을 이루고, 2년 만에 도시를 이루었다[一年成邑, 二年成都]” 라고 한데서 연유한다고 하니 이미 24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도가 아닌가!
기원전 4세기에 진秦 혜왕이 촉을 멸망시키고는 성도현을 두어 촉군의 소재지로 삼았고, 한 나라에 와서는 익주益州의 소재지가 되었다. 비단이 유명하여 아름다운 이곳 비단을 촉금蜀錦이라 하였다. 금관성錦官城 혹은 금성이란 별명도 여기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 이곳에서 촉한蜀漢(220-263)을 세우고 조위曹魏 손오孫吳와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는 정족鼎足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서진西晉에 와서는 나날이 번창하여, 좌사左思의 명작 <삼도부三都賦> 중 <촉도부蜀都賦>에서는 “집이 연달아 늘어서 있고, 많은 행랑채에는 보화가 가득하였다.[比屋連甍, 千廡萬寶]”, “비단이 매우 많고 재화가 산적하였다[羅肆巨千, 賄貨山積]”라고 하였으니 그 재화의 풍부함과 상업의 풍성함을 알 수 있다. 지금껏 이곳은 물화가 풍부하여 천부天府 - 하늘의 곳간 - 의 땅이라고 하지 않던가!
당나라 중기에 안사의 난으로 현종이 이곳에 피신하여 오면서 한때 남경南京으로 이름이 바뀐 적도 있었다. 당시 시선詩仙 이백이 <상황서순남경가上皇西巡南京歌>에서 성도의 많은 집을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묘사하면서 ‘풀나무와 구름 낀 산은 마치 비단을 수 놓은듯하여 장안도 여기에 미치질 못 하네.[草樹雲山如錦繡 秦川得及此間無]’라고 하였고, 두보는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시를 읊으면서 ‘성도 성안은 십 만호가 시끌벅적한 큰 도시’라고 역시 번성함을 노래하였다.
당말 오대에는 전촉 후촉이 모두 이곳에서 건국하였는데, 전촉의 왕연王衍, 후촉의 맹창孟昶이 모두 풍류를 즐기는 바람에 이때부터 이곳에 풍류를 즐기는 기풍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맹창은 궁정의 담장 가에 돌아가며 두루 부용을 심어 부용성이란 이름도 얻었다.
이 도시는 하천이 종횡으로 흐르고 녹지가 매우 많으며 무후사, 두보초당, 망강루 등의 역사와 인문이 어울린 흔적 또한 많다. 또 한漢 대의 사마상여司馬相如나 양웅揚雄 등은 물론이거니와 시대를 내려오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잠시 와서 살거나 유람하면서 시문을 남긴 사람도 아주 많으니, 특히 당대의 이백, 두보, 백거이, 원진, 이상은 등과 송대의 소식, 육유陸游 등이 여기에서 주옥같은 명시들을 남겨 성도의 아름다움은 세월을 가리지 않고 후인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이 도시는 나에게 매력 넘치는 도회로 다가오지 않았던가!

Ⅱ.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티베트 여행을 주선하는 유스호스텔이 성도의 무후사 앞에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기에, 늦은 시각 캄캄한 밤에 역에 내리자 비속에서 무턱대고 찾아온 곳이 이곳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방이나 침상은 다 나가고 오직 10인실에 몇 침상만 남아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일박에 30위안(우리 돈 약 3.900원)을 지불하고서는 얇은 시트 천조각과 베개를 받아들고 3층의 후미진 곳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양 옆 2층으로 8침대가 있었고 문 쪽 벽에 2층 침대가 하나 놓여있었다. 중앙의 공간에 놓여있는 탁자 위에는 선점한 사오명의 젊은이들이 포커놀이를 하며 한담하고 있다가 낯선 백발의 초로가 들어서자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이 무척이나 황당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소개를 하였더니 그때서야 그들도 반갑게 다가와서 자기소개를 한다. 이 일행은 상해의 동제사덕문의학당同濟社德文醫學堂에 다니는 20대 초반의 남녀 대학생들이었다. 모두가 먼 곳에서 상해로 유학 와서 공부하던 중 방학을 맞아 함께 사천과 운남을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특히 그중 한 여학생의 고향은 명나라 말기의 여행가 서하객徐霞客이 <서하객유기游記>에서도 서술한 곳으로 이미 내가 가본 운남 남부의 건수建水부근이 고향이라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고 좋아하였다.
내가 이 방에 들어와서 이제 빈 침대는 내 침대 상단을 포함하여 두 개가 남았는가 보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얼핏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삐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일행인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동양여성 한 사람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직 앳된 서양청년 한 사람이 용케 침상 하나씩 차지한 이 방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그중 여인이 사다리를 밟고 내 위의 침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이쿠! 작년 여름 곤명에서는 여자 위에서 잤는데 오늘밤은 여자 밑에 깔려서 자겠구나.’ 혼자 실소를 해본다. 두 사람은 인종에 관계없이 아주 다정하였으며, 특히 여인이 청년을 매우 아끼는 듯 보였다.
이제 달아난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지는 불협화음의 연주는 한번 달아난 잠을 더 꼭꼭 붙들어 맸다. 이리 뒤척이다간 저리 돌아눕고 정말 전전긍긍이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떠들썩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6시가 다 되어 날이 훤했다. 이미 떠나간 사람도 있었다. 상해의 의과대학생들도 부산하게 떠들며 짐을 챙기더니 나에게 ‘무사히 여행을 잘 마치길 바란다’며 떠나갔다. 운남의 곤명昆明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간다나. 이제 이 방안에는 늦게 와서 내 단잠을 깨운 동서양 커플과 나 밖엔 없었다. 아직도 그들은 각기 자기 침상에서 신나게 잘 자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아침 식사를 한 후에, 1층 로비에서 티베트 행 비행기를 문의하였더니 빨라도 23일이 되어야 ‘티베트 여행허가서’가 나오고 좌석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라싸에서 상해가는 비행기는 28일에만 잔여석이 있어 가능하며 허가서와 왕복 비행기 표를 합하여 모두 5.040위안이 든다는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티베트에 있는 기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아 별로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는 라싸의 축제와 겹쳐 표를 구하기가 더 어렵다고 제법 엄포도 놓는다. 이왕 티베트를 목표로 삼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나중에 애석할 것 같았다. 큰 맘 먹고 거금 3천 위안을 선금으로 지불하였다.
마침 1층의 로비 한쪽 구석에 컴퓨터가 두 대 놓여있었는데 여자들이 앉아서 한글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그런데 그중 한 여자는 지난 밤 내 단잠을 깨우면서 내 위의 침상으로 올라간 여자가 아닌가? 깜짝 놀랐다. 영어와 중국어가 능통하여 이제껏 중국여인인 줄로만 알고 속으로 흉도 좀 하였는데 말이다. 그러나 한편 반갑기도 하여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세요?” 하니까 자기도 쳐다보곤 흠칫 놀라더니 “그렇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홀로 북경에 와서 미국인을 처음 만나 같이 여행하는 중인데 앞으로 티베트로 들어갈 계획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면서 연전에 중국에서 몇 년 취업하여 있었기에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리 젊은 신세대라지만 외국에서 며칠 만에 어린 서양인을 사귀고 또 그를 꼬드겨 같이 여행 다닐 수 있는 그 당당한 태도에 새삼 개방적 성문화를 느끼며 오히려 내가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비에서 빈 방을 물색하니 오직 4인실만 하나 비어 있다고 한다. 일박에 40위안으로 3일을 예약하였다. 시트와 베개를 챙겨들고 방에 짐을 옮겨놓은 다음, 오전에 무후사에 들렀다가 오후에는 두보초당을 돌아보는 일정을 짠 후 숙소를 나섰다.

Ⅲ.
길을 건너니 바로 무후사의 동문이 떡 버티고 서있었다. 중국 어디든 제갈량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를 기리는 사당인 무후사가 있다지만 그 중 역사와 규모 및 의의로 볼 때 가장 뜻 깊은 곳이 이 곳 성도의 무후사이다. 가벼운 흥분을 안고 동문을 들어서자 정면에 발이 셋인 거대한 청동 정鼎을 만들어놓고 위에는 서로 겨루고 있는 용 세 마리를 조형하여 놓았다. 바로 위, 오, 촉의 삼국을 뜻하는 것 일게다.
여기에서 왼쪽의 호수 사이로 가면 남교공원南郊公園이다. 남교공원은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숲과 나무와 호수가 좋고 아름다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으며 광장도 갖추고 있어 운동을 하거나 소일을 하는 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오늘도 많은 노인들이 여유로운 걸음 거리로 공원으로 삼삼오오 천천히 몰려들 가고 있었다. 이 공원의 한쪽 귀퉁이는 유비의 손자 유담劉湛이 1,700년 이상이나 영면을 취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유담은 촉한蜀漢의 3대 황제로, 우리에겐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아두阿斗라고 하면 더 귀에 익어 친근한 유선劉禪의 아들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유비의 능과 무후사가 있는 구역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어서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기운을 맡아보고 싶었고 출사표出師表의 명문名文을 되새겨보고 싶었다. 게다가 할아버지를 먼저 찾은 뒤에 손자를 찾는 것이 순리일 것 같았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무후사는 제갈량(181-234)의 사당으로 기념되고 있다. 제갈량은 산동의 낭야군 사람으로 걸출한 정치가이며 군략가로서 유비를 도와 천하를 삼분하여 촉한을 건국하였다. 촉의 승상丞相에 올랐으며 오장원五丈原에서 죽은 후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사당은 서진 말년에 선제先帝 유비의 소열묘昭烈廟 부근에 처음 건립되었다.
그 후 명나라 때 소열묘 안으로 들어와서 합쳐졌다. 그리하여 살아서 17년을 항상 같이하던 임금과 신하는 죽어서도 영원을 함께하는, 중국 역사상 유래가 없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무후만의 공간인 줄로 잘못 알고 왔다가 안으로 들어서면서 곧 눈에 들어오는 한소열릉漢昭烈陵이란 편액을 보고 의아해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리라. 명 말에 전쟁으로 훼손되었다가, 지금의 사당은 청 강희 11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웅장한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서 자못 엄숙한 맛이 더하였다.
한소열릉이란 편액 밑을 지나니 경내에는 두보가 말한 아름드리 옛 잣나무가 울창하게 큰 키를 뽐내고 있었다. 누대에 걸쳐 이곳을 찾아와서 남긴 시들은 많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시로 꼽히는 두보의 <촉나라 재상(蜀相)>을 보면 ‘승상의 사당 어디 가서 찾는다지?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우거진 숲[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 이라 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우람한 측백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아! 이 나무들의 조상을 보고 두보가 여기를 찾았겠구나! 나무 한 놈을 붙잡고 툭툭 치며 두보의 안부를 물었으나 이 눔 들은 척도 않는다. 뼈대 있는(?) 가문이라 허름한 나그네 정도는 아예 무시해 버리는가 보다. 손바닥으로 탁 때려주었다. 미동도 않는다.
조금 가서 왼쪽으로 돌아서니 바로 유비의 능역으로 혜릉惠陵이다. 이 능은 봉토의 높이가 12미터이고 아래에는 둥그런 벽돌이 호석으로 둘러쳐져 있다. 봉분 위에는 큰 나무와 꽃들이 마치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사진을 찍었다가 나중에 그 사진을 보고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머리를 여러 번 갸우뚱거린 후에야 겨우 생각을 해냈을 정도로 우리네 능묘의 개념과는 너무도 달랐다.

Ⅳ.
유비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북河北 탁현琢縣 출신의 인의와 성심이 돈독한 촌사람 유비를 생각하며 그의 잠자리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역사적 사실이 허구화된 <삼국연의>에서는 왕조의 정통사상에 대한 미화와 윤색이 깊게 침투하여 인의의 화신인 어진 임금의 전형을 창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간웅 조조曹操와 같이 ‘차라리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하지 않겠다.’라는 현실적인 지도자를 설정해 놓고는 그와 명확하게 대비시키기 위해 각색하여 창출한 인물이 유비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비가 미화되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삼국연의>는 후한 말부터 서진西晉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인 <삼국지>를 바탕으로 출발해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허구화를 거듭하여 소설화되어 오다가 명대 나관중羅貫中에 와서 완전한 틀이 형성된 장편소설이다. <삼국연의>에서 내용의 질적 변화가 크게 나타난 것은 남송 때의 주희朱熹에 의해서이다. 위魏를 정통으로 해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내용이 이제 명분을 중시하고 인의를 귀하게 여기는 촉한의 유비에게로 정통성이 넘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유비는 졸지에 백성의 소망이 반영된 어진 임금의 전형이자 인의의 화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비에게 긍정적인 측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삼국연의>의 곳곳에서 유비의 인간적 약점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자주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인의의 화신이면서 역시 그를 망친 것도 인의 때문이라는 모순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제갈량이 인의의 지사라는 소문을 듣고 남양南陽의 융중隆中에 까지 그를 찾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얻고, 그로부터 융중결책隆中決策이라고 하는 통일계책도 얻는다. 그리하여 제갈량의 도움으로 촉땅을 얻어 촉주가 된다.
도원결의의 의기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미덕이지만, 이것이 결국에는 사사로운 정을 너무 중시함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대세를 그르치는 단초가 된다. 고집이 세고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한 관우關羽가 제갈량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항상 엇나가다가 결국 동오의 장수 여몽呂蒙의 계략에 걸려 형주荊州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자, 단지 도원결의한 형제의 인의를 지키기 위해 제갈량의 만류를 팽개치고 군대에 상복을 입혀 출정하여 복수를 하려 했다니 이건 어린아이의 치기로 밖에 볼 수가 없다.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아우를 죽인 원수와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고 부르짖는 그의 인의는 한 나라를 책임질 만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현군의 인의가 아니라 소아병적인 인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일게다.
결국 동오에게 패퇴하고 자신도 백제성白帝城에서 숨을 거두게 되니, 백성을 위한 대의의 인의를 저버리고 개인의 인의를 앞세움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한 왕실을 부흥한다는 융중결책은 그만 결단이 나고만 것이다. 선공후사先公後私란 말을 무색하게 만들며 자신과 촉한의 운명을 재촉했을 뿐 아니라 자기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게 많은 고통만을 안겨주었으니 어떻게 보면 그는 거시적인 안목이 없는 무능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양반, 곧 죽으면서도 급하게 달려 온 제갈량에게 어린 아들 아두를 부탁하면서, ‘내 아들을 도울 만하거든 도와서 통일을 하던지, 아니면 네가 촉의 주인이 되던지------’라고 말한다. 제갈량이 신명을 바쳐 충절을 다할 것(국궁진췌鞠躬盡瘁)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결코 그가 아두의 자리를 빼앗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고, 그렇기에 더욱 감동시켜 충성을 공고히 하려고 제법 인의의 군자인양 노회하게 한 마디 던진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유비탁고劉備托孤라고 한다던가.
그래서 그런지 이 무후사에서는 임금인 유비보다도 신하인 제갈량이 더 기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이름부터가 무후사가 아닌가!

Ⅴ.
유비의 묘역을 벗어나서 삼국문화진열실에 들렀다. 당시의 유물은 몇 점 되지 않고 모두 모사품을 전시해 두었다. 전장과 무기 중심의 진열품을 대충 일별해 나가다가 당시의 가용歌俑(노래하는 인형)을 만났다. 이놈의 얼굴 인상이 퍽이나 밝고 해학적이어서 한참을 서로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까지 살벌한 전장의 풍진 속에서 헤매다가 잠시 여유를 얻은 것 같아 오히려 내가 즐거웠다. 허나 이 눔이 나보다 잘 생겨 여유도 잠시였다(?).
진열관을 나와서 측백 사이를 조금 걸어 정문 옆으로 나왔다. 여기에서 안쪽이 무후의 영역이다. 정문에서 이문二門으로 가는 길목의 왼쪽에는 명나라 때 세운 명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당나라 때 세운 당비가 있었다. 명비는 먼발치에서 슬쩍 일별하고 당비는 제법 유명한 비이기에 주위를 돌아가며 서체를 감상하였다. 비갈은 당 나라 때(809) 처음 세웠는데, 글은 당시 재상 배도裵度가 짓고, 글씨는 서예가 유공작劉公綽이 쓰고, 명장名匠 노건魯建이 새긴 비석으로 문文과 서書와 각刻이 모두 정밀하고 뛰어나 세칭 삼절비三絶碑라고 부른다. 이름값대로 필력이 힘이 있어 웅혼하고 기세가 강렬하였다.
이문二門의 대련에서는 유비의 삼고초려를 칭송하고 있으며, 또 다른 대련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한 곳에서 천추에 길이 합사되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문을 들어서니 양옆에는 회랑이 한소열묘漢昭烈廟의 정전正殿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문의 동쪽 회랑의 벽에는 제갈량의 융중대隆中對가 민국 초의 서예가 심윤묵沈尹黙에 의해 쓰여 있었고, 서쪽 회랑에는 송대의 만고충신 악비岳飛가 웅혼한 필체의 초서로 신나게 휘갈겨 쓴 출사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동서 양랑兩廊(문신랑文臣廊과 무장랑武將廊)에는 우리가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이름이 친숙해진 촉한의 문신 무장 18명의 소상이 머리 위에 이름표를 달고 온화하거나 험상궂게 서있었다. 유비의 정전正殿에는 업소고광業紹高光(업을 계승하여 높이 빛내다)이란 편액이 크게 걸려있었으며 귀를 길게 늘어뜨린 유비가 금을 덮어쓰고 점잖게 앉아있는 소상과 그 손자 유담劉湛의 소상이 온화하게 앉아있고 그 좌우의 편전에는 관우와 장비가 눈을 부릅뜨고 제법 위엄 있게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금으로 칠갑하여 폼은 많이도 잡고 계셨다. 사당을 돌아 나서려니 한쪽 벽에 서진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정사正史인 <삼국지>의 ‘선주전先主傳’을 제법 잔잔한 해서로 써 놓았다. 여기에는 아무리 눈 닦고 찾아봐도 삼고초려의 사실은 없다. 정사에서는 그저 평범한 왕일 뿐인가?
유비의 사당 뒤로 나오자 더 장엄한 모습의 무후사가 나타났다. 이 건물들의 가장 중심이었다. 우선 앞에 있는 과청過廳을 지나며 위를 올려보자 ‘선주와 무후가 같은 궁궐에 있네[先主武侯同闕宮]’라는 편액을 걸어 임금과 신하가 함께 함을 표하여 한층 무후를 높이고 있었다.
과청을 지나니 비로소 무후의 정전正殿이 나타났다. 전殿의 기둥에는 영련이 많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 한 대련에는 ‘한 번의 대면으로 천하대세를 논하고, 두 번의 출사표出師表로 삼고초려에 보답하도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 대련이 제갈량의 필생의 사업을 한 마디로 개괄하여 나타내고 있음과 동시에 유비와의 관계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유비 사후 후주 아두를 잘 보좌하였으며, 두 차례나 출사표를 지어 통일을 위한 북벌에 신명을 바쳤으니 이는 삼고초려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란다. ‘명수우주名垂宇宙(이름이 우주에 드리운다)’라는 편액이 걸린 사당의 정중앙에는 무후의 금칠한 소상이 너그러운 폼으로 자리 잡아 앉아 있었고, 그의 양측에는 아들 제갈첨諸葛瞻과 손자 제갈상諸葛尙의 소상이 마치 양쪽에서 옹위하듯이 서있었다. 그리고 무후의 머리 위에 ‘정원당靜遠堂’이란 제자題字는 무후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계자편戒子篇>에 ‘평안하고 조용하게 멀리를 내다본다.[寧靜以致遠]’라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여기 편액에서 그의 안정安靜과 무욕의 추구를 통한 밝은 지혜와 거시적 안목을 엿볼 수 있으리라.
한참을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문득 그가 후주 아두에게 바친 전후 두 편의 ‘출사표’를 통해 가장 내 머리에 남아있는 구절이 떠올랐다.
‘신臣은 본래 포의布衣로 몸소 남양南陽에서 밭을 갈아 간신히 난세에 생명을 보전하며 제후에게 영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는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외람되게도 스스로 굽히시어 세 번이나 신의 초려를 돌아보시고 신에게 당시의 세상일을 물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선제께 힘을 다 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뒤에 나라가 위태로운 패전의 때에 임을 받고 국가 위난의 때에 명을 받들어, 이후 21년이나 되었습니다. 선제께서 신의 근신함을 아시는 까닭에 붕어에 임하여 신에게 대사를 부탁하셨습니다.’
이 ‘전前 출사표’에서 처음으로 삼고초려가 언급되고 있으며, 아울러 융중대의 결책 및 선주와 후주를 충심으로 모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 인의를 지킨 자는 누구인가? 거시적인 혜안을 갖고 앞을 내다 본 자는 과연 누구인가? 역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임금과 신하를 한 곳에 같이 엮어놓고서는 신하를 오히려 더 높이 받듦으로 명확하게 대비를 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이름마저도 무후사라고 하여 그 속에 유비의 사당과 묘를 다 거느리게 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어째 한 편으로는 유비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무후의 사당을 돌아 나오자 뜰을 사이에 두고 삼의묘三義廟가 보였다. 여기에는 평복을 입은 유비의 삼형제를 함께 모셔놓고 있었다. 고집쟁이 관우는 한번 씩 쳐다보며 지나치고 그래도 친근감이 가는 털북숭이 장비는 일부러 찾았다. 여행을 출발하면서부터 깎기를 생략해버린 내 수염을 만져보면서 누가 더 텁수룩한지 견주어보려 했지만 아직은 태부족이라 쓴웃음만 배어나왔다.
삼의묘 뒤로는 밖으로 나가는 출구 너머에 도원결의를 기려서 만든 결의루結義樓가 오른쪽으로 금리錦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냥 바로 출구로 나가려니 왠지 서운한 감이 들어 다시 되돌아 뜰 안으로 들어와서 한 바퀴 맴돌았다. 도원桃園과 공명원孔明苑, 강설원降雪園의 분재와 초목을 두루 완상하였다. 공명원을 지나 혜릉 쪽으로 가는 길은 양쪽에 붉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붉은 담으로 둘러쳐진 곳은 천자의 영역이다. 마침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이 길을 혼자서 왔다 갔다 하니 내가 천자라도 된듯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다 해보았다.
녹우헌綠雨軒과 명취루鳴翠樓를 거쳐 쉼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니 다리가 하소연을 해댄다. 그 바람에 잠시 계하루桂荷樓 앞마당의 대나무 의자에 푹 퍼지고 앉았다. 이곳에서 마신 사천 특산 몽정차蒙頂茶는 그 상큼한 맛에 이열치열의 시원함까지 더해 주었다.

Ⅵ.
시간도 거나하여, 이제 일어서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러나 자꾸만 미련이 남는 것은 왜일까? 출구로 나와서 밤이면 변검變臉을 위시한 천극川劇(사천지방의 전통극)의 공연장으로 쓰이는 결의루 옆을 돌아 명청 시대의 고풍스런 건물들로 단장된 금리를 지나오면서도 여전히 제갈량이란 인물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제갈량, 그는 촉한을 세운 이후 승상의 임무를 맡아 심모원려深謀遠慮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정치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고, 유가의 민본사상과 법가의 법치주의로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린 인물이다. 한편 목숨을 바쳐 충절을 지킨 ‘고금 제일의 현명한 재상’이었다. 그는 항상 극기봉공克己奉公과 신상필벌의 원칙을 지켜 이를 자신에게도 여과 없이 적용하였다. 울면서 아끼던 부하 마속馬謖의 목을 베거나(읍참마속泣斬馬謖) 양평관 싸움에서 촉의 군사가 후퇴하게 되자 스스로 자신의 관직을 세 등급이나 낮춘 일에서도 그의 공정무사公正無私함은 드러난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민중의 사랑을 받고 동시에 충의의 화신인 신하의 전형으로 전제군주들이 탐을 내던 그는, 결국 살아서는 유비를 받들었지만 죽어서는 오히려 유비가 자신을 받드는 형국으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두보는 <촉나라 재상(蜀相)>에서 ‘세 번 찾은 번거로움 천하 위한 헤아림이오, 두 조정 건짐은 늙은 신하의 단심이라. 군사를 내어 못 이기고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후세의 영웅들 눈물로 옷깃 적시네!’ [三顧頻繁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 出師未捷身先死, 長使英雄淚滿襟]라며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 이 중에서 마지막 두 구절은 결코 제갈량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닐 것이다. 모든 시대를 살고 있는 뜻있는 사람들의 거룩하고 장한 의지가 당시에는 보답을 받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돌아가는 것 같아도 민중 속에서 역사를 두고 면면히 이어져 결국은 이처럼 길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금리의 돌 패방을 기웃거린다. 금리는 옛 성도의 다운타운으로 두보나 이상은의 시에서도 자주 그 이름이 등장하는 곳이다. 지금은 명청 시대 양식으로 치졸하게 꾸며놓고 관광객을 불러 모우는 어설픈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지만, 금리의 먹거리 골목을 지나면서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골목을 빠져 나오기 전에 설탕을 불에 녹여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설탕 공예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기술에 경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구경꾼의 등 너머로 물끄러미 넘겨다보고만 있었을 뿐 오직 머릿속은 무후사의 여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한마디]
노타이  무후사의 여운이 내 마음속까지 그대로 느껴지네.., 나도 꼭 한번 다녀 와야지.., 우리 동기들이 다 한가락씩 하는 것을 알지만, 범은 선생도 대단하다고 느껴지오. 실력이 정말 많은 범은 선생이 우리 동기라 생각하니 또한 행복함을 느낀다오.. 2010-07-15 오후 5:32:00 x

오중관  무후사라.사당같은 데. 역사와 여정이 흠뻑 뭇어나나, 등장인물이 많아 이해는 낮지만 나의 무지요. 나의 무지탓이요. 범은아 우리에게 중국역사와 인문을 강의해다오. 2010-07-15 오후 2:29: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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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임금과 신하가 함께하니 2010-07-14 이범은 1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