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도강언에서 청성산은 불과 15㎞ 떨어져 있었다. 도강언 시내를 벗어나자 얼마가지 않아 청성산 아래 마을의 식당촌에 버스를 세운다.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고 간다는 것이다. 갑자기 아침 식사를 거른 것이 생각났다. 평소에 한 끼라도 건너뛰면 죽는 줄 알고 있는 내 배가, 오늘은 새로운 호기심과 경이로움에 찬 내 눈에게 완전 골드게임 패를 당한 셈이다. 전혀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막상 식당에 들어서자 승부욕이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 같다. 배가 고파진 것이다. 오늘 아침 급조된 우리 일행 스무 사람은 안내하는 대로 같은 방에 들어가니, 큰 테이블 두 개에 열 명씩 나누어 앉으란다. 앉다보니 서양인 일 가족 네 명에 그들과 같이 온 남녀 통역 안내원 두 명, 절강성 온주에서 온 두 여인과 어린아이 그리고 나, 이렇게 열 명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게 되었다. 서양인은 영국에서 이곳 성도의 대학에 교환교수로 온 사람이었다. 여자 통역은 그 대학 학생으로 따라왔고 남자 통역은 직업적인 전문 가이드였다. 이 두 남녀 중국인은 서양 교수 가족을 마치 칙사인양 대접하고 있었다. 지금 중국은 영어 열풍에 전국이 들썩거려 영어만 쓰는 나라 사람은 몸만 가져와도 대접을 받는 형국이 되어 영어권의 젊은이들 중 놀기 삼아 와서 실컷 대접받고 돈 벌고 즐기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영어 사대주의는 우리네보다도 심한 것 같이 느껴지더니 여기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전혀 제3국인인 내가 보아도 꼴이 사납다. 그런데 남자 통역 가이드가 가만있는 나마저 들쑤신다. 아무리 봐도 외국인 같다며 혹시 일본인 아니면 한국인이 아닌지를 영어로 묻는다. 중국어로 심통스럽게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면서 이제 중국어로 자꾸 말을 건다. 건성건성 대답해 주었더니 이 녀석, 이 사람은 한국인으로 배낭여행 중이라며 그대로 영국인에게 고발하는 것이 아닌가? 영국인이 나에게 자기 이름을 말하며 손을 내민다. 이 여름 더위에 저 모피 가죽을 잡아야 하다니! 차례로 아내와 자식을 소개한다. 그들은 민둥하고 보드라운 가죽이라 그래도 감촉은 좀 나았다. 큰 밥통에 쌀밥을 가득 담아 테이블에서 돌려가며 필요한 만큼 퍼서 여덟 가지의 반찬과 더불어 먹는 식사는 ‘시장이 반찬’이라 꿀맛 이상이었다. 식사가 들어온 후부터는 입의 역할이 바뀌는 바람에 간간히 일상적 이야기만 나왔을 따름이다. 밥알이 불면 날아갈 정도로 독립성이 강해 갑자기 튀어나갈 가봐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청성산에 들어섰다. 청성후산과 갈림길에서 전산 쪽으로 틀어 조금 더 가서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의 해발이 이미 800미터나 되었다. 먼저 붉은 행서의 ‘서촉제일산西蜀第一山’이란 현판이 삼층의 고풍스런 일주문 위에 다소곳이 걸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를 지나자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오른쪽에는 도관道觀(도교 사찰)인 건복궁建福宮이 정갈하고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고,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청성산 산문이다. 산문은 지붕의 처마가 청성산을 찌를 듯이 높이 치켜들려 있었고 알록달록한 용과 닭 벼슬 모양의 치미아래에는 도사 풍의 조각상이 이끼 낀 골기와 위에 앙증맞게 서 있었다. 산문의 앞가슴에는 현대 작가가 큰 글씨의 초서로 ‘청성산유자규제靑城山幽子規嗁(청성산 그윽하고 자규는 소리 내어 우네)’라고 일필휘지해 놓았다. 그렇다. 이 청성산은 사방 100킬로에 걸쳐있으며 주봉은 노소봉老霄峰으로 해발 1,300여 미터가 된다. 아열대기후대에 자리하고 있어 사철 숲이 울창하여 항상 푸른 봉우리들이 둥글게 늘어서 있어 마치 그 모양이 성곽 같다고 하여 청성산이라 한단다. 36봉 72동洞 108경이 있어 경색이 청아하고 영정寧靜하여 그윽한 중에서도 빼어나고 기이하다. 고로 ‘청성천하유靑城天下幽’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꼽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청성의 그윽함[幽]을 아미산峨眉山의 빼어남[秀]과 기문夔門의 웅장함[雄] 그리고 검각의 험준함[險]과 더불어 ‘천중사절川中四絶(사천의 사절)’로 꼽았다고 한다. 이제 그 그윽한 청성에 발을 들인 것이다.
Ⅱ. 깃발 든 안내원을 따라 영락없는 유치원생 나들이 마냥 청성산문을 들어서서는 바득바득 좁은 길을 올라갔다. 두보초당의 화경은 이름이 예쁘다. 그러나 이 길의 그윽한 운치에 비하면 군소리 없이 그 이름을 내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가팔라도 고된 줄 모르겠다. 하늘을 막아버린 울창한 잡목과 대나무 숲, 그 사이에 살포시 머리 내민 야생의 꽃, 푸드덕 날아가는 새소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부지런히 따라붙으며 열심히 살펴 눈에 넣는다. 헐떡거려 올라가자 천연각天然閣이 나온다. 이름 그대로 천연스럽다. 좁은 길 돌계단 위에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올려 너와로 삼층의 지붕을 올린 운치는 보기만 해도 절로 피로가 풀리는 쉼터이다. 양쪽 기둥에는 제법 영련까지 달려있다. ‘연하회구려, 산월반도인[煙霞懷舊侶, 山月盼道人(그윽한 안개 노을은 옛 친구를 그리워하게 하고, 산위에 걸린 달은 도인을 간절히 기다리네)]’라는 글이다. 천연각이란 이름 자체도 도가道家의 냄새가 물씬 난다 싶더니만 글귀는 한 술 더 떠 이 산이 도교道敎의 본산이란 것을 일깨워주었다. 노자老子의 도가사상은 후세에 와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형되거나 혹은 다른 사상과 결합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국 고대의 여러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이룬 도교이다. 도교에서 노자를 자기들의 개조 내지는 중흥조로 받들고 있어 이 때문에 우리가 도교와 도가를 혼동할 때가 많다. 원래는 서로 성격이 다르므로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 도가가 하나의 철학사상이라면 도교는 원래의 도가사상을 종교적인 형태로 변형시킨 하나의 종교사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현실을 초극하려는 자세는 상통하지만, 도가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있고 도교에서는 삶과 죽음에 자유스럽지 못하여 불로장생을 추구하고 신선술을 믿고 있다. 후한 말기의 정치적 혼란기에 도가사상이 완전히 변형되어 점차 종교적 형태, 즉 도교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곳 청성산은 초기 도교의 한 갈래인 오두미교五斗米敎의 총본산이었던 곳으로 도교의 창시자 장도릉張道陵(장천사張天師)이 일찍이 이곳에서 교단을 설치하고 포교하였다고 한다. 종교적 구원을 선전하며 등장한 장도릉은 입교자에게 쌀 다섯 말을 바치게 하였기에 오두미교라고 불렀으며, 그의 칭호를 따서 천사도天師道라고도 했다. 그는 <삼국지연의>가 시작하면서 나오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의 주역인 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를 포용하여 도교의 기반을 닦는다. 구원을 얻는 속죄의 방법으로 노자가 저술한 <도덕경>을 암송하게 한 것이 도가사상과의 인연이었다. 그의 손자 장노張魯가 교단의 법을 정비하여 비로소 제정일치의 종교 왕국을 성립시켰으나 결국 조조의 공격을 받아 오두미교의 종교조직은 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 이념은 도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도교가 전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게 된 것은 당나라 때부터이다. 당나라의 창업군주 이연李淵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자신과 같은 성씨인 노자를 끌어당겨 조상으로 받들어 여러 군데에 도관을 지어 도교를 크게 번창시켰다. 이때 우리나라에도 사신과 도사를 보내 도교를 권하기도 하였으니 당 왕조의 의도적 극성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곳 청성산에도 곧 불교와 도교의 세력 분쟁이 생겼으나 후에 당 현종이 조칙을 내려 도관은 도가에 돌려주고 절은 산 밖에 두게 명령하여 이후에 사천에는 ‘도가는 청성에 거하고, 불가는 아미를 차지한다[道居靑城, 佛占峨眉]’는 국면이 되었다. 이후 청성산에는 도관이 숲처럼 들어서서 100여 개가 넘는 도교의 명산이 된다. 도교를 바탕으로 하여 송나라 때 이순李順이나 명말의 장헌충張獻忠 등의 농민 봉기가 바로 이곳에서 기의起義한 것이다. 지금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많이 훼철되고 약 30여 도관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Ⅲ. 석순봉 아래에서 천사동으로 가는 길과 헤어져 좁은 오솔길을 계속 올라갔다. 산등성이 하나에 올라서자 발아래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해발 850미터 지점의 월성호月星湖이다. 배를 타고 이 호수를 건너가서 삭도索道를 타고 올라간단다. 안내원이 일행을 호수가의 망사랑望師廊이란 회랑에 모아놓고는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 삭도로 올라갈 사람은 왕복삭도비와 도선료를 내고, 걸어갈 사람은 4시까지 산문 앞으로 오란다. 시간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고 또 지형도 생소한 곳에서 선택의 여지도 없는 완전 배째라는 식의 횡포다. 늘상 이런 식이라 분도 나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서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건넌다는 것은 그윽하고 정취가 있을 것이란 유람의 기대감에 약간의 흥분도 일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채 1분도 안 가 무참히 깨져버렸다. 배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배나 물의 혼탁함과 더러움이 오히려 도회의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깊은 산의 호수답잖게 물은 거무칙칙하고 여기저기 쓰레기가 둥둥 떠다녀 운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은 얄팍한 상업주의로 마구 훼손되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보이는 호수가의 풍정은 제법 운치가 그럴 듯하여 시인묵객이 있었다면 한 수 나올 법도 했다. 이름이 보운랑步雲廊인 삭도를 탔다. 삭도의 이름이야 구름을 걷는다는 뜻이지만 마치 구름위에 걸터앉은 것 같았다. 이때까지 나의 지론은 어지간한 산은 걸어서 올라간다는 것이었지만, 맞바람을 가르고 깊은 골짜기를 한 눈에 넣으며 편하게 앉아 위로 올라가는 이 맛도 삭도만의 별미가 아닌가! 아래의 큰 바위에는 채색한 도사道士와 불佛의 그림이 군데군데 그려져 있어 이 산의 종교성을 새삼 각인시켜주기도 했다. 순식간에 종착점인 해발 1,090미터의 능운산장凌雲山莊에 올랐다. 이름도 잘 짓는다. 도교의 장천사張天師(장도릉)를 앙망하여(망사望師) 달과 별의 호수를 건너(월성月星) 구름 속을 걸어와서(보운步雲) 이제 구름을 넘은(능운凌雲) 것이다. 구름 위엔 무엇이 있을까? 안내원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 일행더러 자유롭게 구경하고 4시에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산문에서 보잔다. 상청궁上淸宮을 향해 올라가다가 자운각慈雲閣을 지난다. 아마도 상청궁의 첫 대문인 것 같다. 세 칸 중 왼쪽에는 토지신을 모셔 놓았고 오른쪽에는 진산왕鎭山王이란 산신을 모셔 놓았다. 그 중간의 아치형 무지개문을 지나면 상청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자운각’ 현판의 좌우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보도중생普渡衆生’의 현판이 중국 수천년래 민초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민초들은 이런 대국적인 명제보다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이며 개인적인 염원인 병을 다스리고 오래 살며 재물을 많이 갖는 데에 더 관심 있었다. 자운각 측면의 약왕전藥王殿 · 장생전長生殿 · 재신전財神殿에는 많은 사람이 그들의 열망을 향으로 태우고 있었다. 예의 중국인 특유의 다발 향을 무식하게(?) 피어재끼는 바람에 이 산속을 온통 몽롱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재신전의 관우關羽 앞은 더욱 지독했다. ‘아. 자욱한 구름 같은 것이 피어올라 자운각인가?’ 혼자 시답잖게 웃어본다. 상청궁을 향해 올라가면서 얼핏 양쪽 대련을 살펴보니 ‘상청을 바라보니 빼어남이 마치 용이 구름을 감고 있는 것 같고[望上淸秀若雲龍]’ ‘앞의 확 트인 곳을 보니 아름다움이 마치 봉황이 화장한 것 같도다[觀大面麗如彩鳳].’라고 적혀있지 않은가! 잠시 멈춰 서서 위로 상청궁을 올려다보니 구름에 쌓여 있는 것이 정말 용이 구름을 감아 있는 것 같았고, 앞의 산봉우리들도 날아갈 듯 아름다운 것이 마치 화장한 봉황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그윽하고 아름다운 곳이기에 예부터 도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던가 보다. 하늘로 솟아있는 상청궁의 처마를 올려다보며 발걸음을 재촉하니 앞에 시선을 막는 일자 담이 나왔다. 이 담을 돌아서면 바로 상청궁의 경내이다. 큰 담벼락에는 오직 한 글자만 붉은 해서로 크게 씌어져 있었다. ‘도道’. 지나가는 중국인을 부리나케 불러 이 글자를 넣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뒷면은 무슨 글자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얼른 돌아가서 보니 노란색 해서의 ‘대도무위大道無爲’이다. 아! 드디어 노자 영감을 만나겠구나!
Ⅳ. 계단꼭대기에서 뒤를 돌아 앞을 조망하였다. 나름대로 풍수를 짚어보려는 것이었는데 그때 우선 눈에 들어오는, 방금 내가 지나온 담장의 노란 글씨가 나를 실소케 만들었다. 제일 가에 있는 ‘위爲’자가 계단 가의 무성한 나무들로 인해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지 ‘대도무大道無’뿐이었다. 이곳엔 큰 도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라면 불변의 도는 항상 도가 아니(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1장)’기 때문인가? 기분이 야릇해졌다. 여기에 정말 노자가 있는 것일까? 상청궁문은 중앙에 큰 문이 있고 좌우에 현포문玄圃門과 요대문瑤臺門이 있었다. ‘현포란 노장의 밭이란 뜻일 게고 - 아마 시문詩文의 아름다움을 비유한 현포적옥玄圃積玉의 현포는 아닐 것이다. - 요대는 신선이 살고 있는 누대를 말하니 이 세 개의 아치문 중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멋질까?’ 많은 중국인들은 가운데 상청궁 현판 밑의 큰 문으로만 꾸역꾸역 들어들 가고 있었다. ‘옳다. 나는 신선이 살고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자꾸나. 그래야 노자와 같은 신선을 만나던지 아니면 재수가 좋아 내가 신선놀음을 하게 될는지!’ 혼자서 작은 요대문瑤臺門으로 들어섰다. 다시 계단이 나타나고 계단 옆의 좌우 축대에는 각각 ‘도’와 ‘덕’이 한 글자씩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와! 노자가 있을 것 같았다. 환희가 일었다. 계단을 올라서자 항마호도降魔護道란 편액의 문이 또 나타난다. 마귀를 항복시켜 도를 지키잔다. 문의 양쪽에는 각각 쉼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왼쪽 ‘덕’이 씌어진 축대 위에 있는 쉼터에는 산 아래에서 이곳까지 2인1조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담부擔夫들의 터미널 격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막 도착하여 뚱뚱한 노파를 내려놓고 숨을 고루고 있었다. 자기 힘으로 올라올 여력이 없는 사람을 돈을 받고서라도 데려와 주는 것이 과연 ‘덕’인지, 아니면 이들이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눈 딱 감고 타주는 것이 옳은 ‘덕’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내 차라리 삭도를 타고 온 것이 이제 와서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마귀를 굴복시켰는지는 몰라도 통당通堂 형식의 항마호도를 쉽사리 지나니 좌우에 청룡전靑龍殿과 백호전白虎殿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전각 옆에는 도가찬청道家餐廳이라는 식당을 두고 관광객을 받고 있었고 찬청 앞에 좌판을 펼쳐놓고 오이를 깎아 팔고 있었다. 중생의 목마름을 구제하기 위해 쌓아놓은 것이 아니고 돈벌이 용이었다. 도관의 뒤편에는 여행객의 숙박시설까지 갖추고 방의 종류와 방값을 게시해 두고 있었다. ‘장사라고 말할 수 있는 불변의 장사는 항상 장사가 아니(상가상商可商, 비상상非常商)’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것은 찬청 뒤쪽의 도가 의학을 소개하는 곳에서 불로초를 팔고 있는 데 비하면 약과였다. 불로와 장수에 대한 도교의 관심은 자연히 도가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이 중국 의학의 토대가 됐다고는 하지만 진시황도 못 잡순 불로초를 팔다니! 상청궁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의 중앙에 있는 수壽와 福의 두 무쇠향로는 사람들이 기원에 따라 골라서 향을 피우는가 보았다. 욕심 있는 자는 두 곳에 다 피울 것이지만 욕심을 버린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야 어딘들 피울 필요가 있겠는가! 계단 위에는 이 도관의 중심 건물인 상청궁의 삼청대전三淸大殿이 단번에 사람을 제압해 버릴 만큼 대단한 위용으로 이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3세기 진晉나라 때 처음 세워진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현존 건물은 19세기 후반 청의 동치同治제 때에 중수한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의 처마 밑이나 기둥은 어디 하나 비어있는 곳이 없이 편액과 주련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도사의 집이 아니랄까봐 ‘도관천지道貫天地(도가 천지를 꿰뚫는다)’나 ‘도덕천추道德千秋(도덕은 천추에 길이 빛난다)’ 등 대부분 ‘도’자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다시 한 번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불변의 도는 항상 도가 아니다.(도가도 비상도)’를 되뇌어 본다. 건물 대들보의 조각과 기둥의 그림 또한 모두 뛰어나 장관이었다. 기둥마다 주춧돌 위에 코끼리를 위시한 동물의 조각상을 두고 그 등위에 기둥을 올려 놓았다. 주심포 양식의 처마 공포마다에는 채색된 도인상이 먼 산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궁을 수호하려는 듯 서있었다. 이 궁의 안쪽 한 복판에는 태상노군太上老君(노자)이 중앙에 앉아 좌우에 여러 도교의 신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큰 관심 두지 않고 하나하나 일별하였다. 역시 불佛도 있었고 재물신 관우關羽까지 데려다 놓았다. 상청궁 앞에는 여러 사람들이 마치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니 도사들께서 앉아 마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옆에 지폐가 놓여있는 것을 봐서 돈 잡숫기 마작이었다. 우리네 같으면 난리가 날, 사찰에서 스님들이 관광객 보는 앞에서 돈 따먹는 고스톱을 치는 형국이랄까! 이것도 일종의 사회 참여인가? 불쾌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불쾌였다. 그들을 둘러싼 각층의 중국인들은 제법 진지하게 구경하면서 자기들끼리 판에 대한 토론도 벌인다. 자연스러움이 성속일여聖俗一如라, 종교와 세속이 같이 뒹굴었다.
Ⅴ. 이 산의 정상에 노자를 모신 노군각老君閣이 있다고 한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기에 큰 맘 먹고 등행을 했다. 상청궁의 오른쪽을 돌아가니 곧 마고지麻姑池란 연못이 나온다. 선녀 마고가 목욕을 하고 단약을 만들던 곳이라고 하며 물이 마르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 사이에 끼어 너무 작아졌고 물 또한 흙탕이었다. 몰라! 마고가 머드팩이나 하려면 내려올는지 모르겠네! 마고지를 지나 상청궁의 경내를 벗어나서 계속 위로 올라간다. 성등정聖燈亭까지 가는 벼랑길 철책의 쇠줄에는 자물쇠가 빽빽하게 얽혀 잠겨져있었다. 부부나 연인들 간에 함께 와서 자물쇠에 이름과 다짐이나 염원을 파서 달아놓고 열쇠는 천길 벼랑 아래로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자연을 벗어난 선계에서 이 무슨 사랑 타령인고! 물론 자물쇠의 상징성을 통해 인간의 가녀린 욕망을 이어가보려는 얄팍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짓거리는 황산에서도 본 적이 있었고, 곳곳의 높은 산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것이지만 도가적 풍모가 남아 있을 이곳에서마저 보게 될 줄은 정말 의외였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니 여러 면(?)에서 도시와 산속을 가리지 않고 수요가 많은 중국 열쇠장수가 부럽기도 했지만 말이다. 성등정을 지나 계속 호젓한 산등성이의 돌판 계단을 올라간다. 길의 양쪽은 모두 짙은 녹음으로 하늘마저 보기가 어렵다. 조그마한 암자인 대적천大赤天을 빠져 나오니 길옆에 거북을 대좌로 삼은 비석이 외로이 서 있었다. ‘대도무극大道無極’이라고 쓰인 비신의 윗부분에는 태극과 팔괘무늬를 가운데로 네 마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도덕경> 28장에 보면 ‘영원히 위대한 덕은 어긋남이 없고 무극으로 되돌아간다.[常德不忒, 復歸於無極]’고 하여 노자는 도를 무극이라 표현하였다. 또 42장에서는 ‘도가 일一을 만들고, 일은 이를 만들고, 이는 삼을 만들며, 삼은 만물을 만든다. 만물은 음을 업고 있고 양을 안고 있으며 꽉 찬 기운으로 화합하고 있다’고 하여 도에서 결국 만물이 생성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 생성의 개념은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생성 개념과 완전 상통하고 있다. <계사전>에서는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을 도라고 하면서 역易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은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는다고 하더니. 이 비석의 글자와 무늬는 바로 이를 설명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이 비석에서 재미있는 것은 거북이가 정면을 향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어 목을 쭉 빼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놈이 목을 틀고 있는 연유가 분명히 있었으리라. 아마 도의 생성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져 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너무나 큰 말씀이라 황송해서일까? 우리네 강원도의 원주 지정면에 가면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의 신도비 귀부의 거북이가 머리를 뒤로 돌려 마치 광해군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직한(비문이 마모되어 글자의 판독이 안 됨) 자기의 비신을 읽고 있는 듯한 모습에 비하면 사실감은 훨씬 뒤떨어졌다만. 동화전東華殿을 보면서 규모가 작고 너무나 호젓한 이 암자에서 여유만 있다면 하루 묵고가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경내를 벗어나자 이 생각은 천리만리 달아나 버리고 말았으니, 동화전 뒤안의 벼랑 철책은 아까 보다 더 많은 열쇠더미였다.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애욕과 정욕을 끌고 올게 무어람. 세속적인 것은 속세에서 풀면 될 것을. 노군각의 경내로 들어섰다. 이 각은 노소봉의 최고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각의 산문 밖 양쪽 석비에 청대 서법가 황운곡黃云谷이 ‘천하제오명산天下第五名山’ ‘청성제일봉’을 각각 써 이를 각해 놓았다. 젊은 중국 청년에게 부탁하여 뒤의 웅장한 노군각을 배경으로 ‘청성제일봉’ 비석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폼 잡는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정말이지 혼자 여행의 좋은 점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가장 낭패스러울 때가 짐을 다 챙겨 지고 끌며 이동하는 중에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야 할 때와 좋은 경관을 만나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내 모습의 포착이 어렵다는 점이다. 이제 아예 후자는 거의 포기했지만 꼭 남기고 싶을 땐 염치불구하고 주변에 똑똑해 보이는 사람에게 들이댄다. “한 장만” 노군각은 밖에서 볼 때는 5층의 높은 건물로 층마다 난간이 있었지만, 안에 들어가면 한 통이었다. 안에는 ‘도덕유방道德流芳’ ‘회선루會仙樓’ 등의 어지러운 편액이 걸려있고 거대한 금칠의 소가 멋진 뿔을 뽐내며 서 있었다. 신선이 모인다는 회선루에서 도와 덕의 명예로움을 후세에 남긴다(도덕유방)니 거창하고도 멋진 말이다. 그러나 차라리 유방을 다른 한자로 대체해서 도덕유방道德乳房으로 하여 신선이 이 회선루에 모여 도덕의 젖을 빨아 먹는다고 하면 더 나을 것 같았다. 야한가? 야하다니 우린 자연自然이란 어머니가 그대로 값없이 주는 무위無爲의 젖을 빨아 먹고 살지 않는가! 계단을 타고 제일 위층의 난간으로 올라가자 청성의 뭇 봉우리가 운해 속에서 부끄러운 듯 살짝살짝 살결을 드러내곤 했다. 남송의 애국시인 육유가 성도에 있을 때 이곳 청성산에 올라와 쓴 <등상청소각登上清小閣>이란 시에서 이 경관을 찬양하여 ‘구름은 옥봉에 와서 크게 일어나니 산이 마치 푸른 파도처럼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네[雲作玉峰時特起, 山如翠浪盡東傾]’라고 한 바로 그 자리가 아마 여기일지도 모르겠다. 더 멀리 조망하니 넓은 사천의 평원과 그 사이를 면면히 굽이져 흐르는 민강을 볼 수 있었다. 멀리 앞에 보이는 포마평跑馬坪과 기간석旗杆石은 명나라 말기 농민군을 이끌고 기의한 장헌충의 부하 장수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깃발을 걸어놓은 곳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훌륭한 유적지가 되는 곳이다. 5층 난간의 벽에는 <도덕경>이 도경과 덕경으로 구분되어 금색 글자로 써 있었다. 도교가 처음 교단으로 성립하던 후한 말 장도릉과 장각 시대에는 노자를 그들 종교의 개조로 받드는 바람에 <도덕경>이 도교의 성스러운 경전으로 존중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아마 이 도덕경도 동진 시대 이후에 오면서 점차 주 경전의 자리를 <황정경黃庭經>이나 <포박자抱朴子>를 위시한 많은 도장道藏(불교의 대장경 같은 것)에게 내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초기 도교의 자리라서인지 노자를 개조로 숭앙하고 도덕경도 여전히 받들고 있었다. 그러나 노자의 상은 있어도 진정 노자는 없었다. 인간적 욕망이 노군각 안을, 아니 청성산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여유가 있으면 꼭 들리고 싶은 곳인 천사동天師洞의 건물들을 위에서 지붕만 조감했다. 상청궁에서 중턱의 그곳까지는 걸어서 약 40분이 걸린다고 한다. 천사동은 이곳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도교 사원으로 당 현종, 청 강희제의 친필과 시인묵객들이 남긴 각종 글씨와 자취가 풍부하다. 특히 천사동 건물의 뒤쪽에는 장도릉이 도를 닦았다는 천연 동굴도 있다. 그 주변에는 그가 심은 은행나무와 팠다는 연못, 붓을 씻었다는 나무통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랴! 마음속에만 담고 버려두고 떠나야 한다.
Ⅵ. 시간 약속에 맞추려면 빨리 설쳐야 할 것 같았다. 상청궁을 거쳐 온 길을 그대로 잽싸게 내려와 삭도를 탔다. 이놈의 삭도가 올라올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올 때는 앞에 산으로 막혀 있었지만 내려갈 때는 일망무제였다. 청성의 여러 봉우리가 빙 둘러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 들어선 도관이 부끄러운 듯 몸을 가리고 지붕만 살짝 보여주고 있다. 월성호도 조그마한 조각달 같다. 스릴감도 강도가 훨씬 높아 마치 놀이동산의 기구라도 타는 것 같았다. 가격 대비 상쾌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산문에 도착했다. 모두가 정확하게 다 모였다. 안내원 왈 “십분 쉬다가 출발”이란다. 무료히 길가 개울의 턱 위에 앉아 있자니 저쪽 한 켠에서 젊은이들이 마치 호객을 하듯이 떠들썩하니 부산하게 설치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나이기에 그냥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뻐근한 다리를 추슬러 그곳에 가보았더니 성도에 있다는 서남석유대학 학생들이 ‘하기 사회 실천대’란 붉은 기를 달아놓고 환경보호하자며 계몽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책상을 죽 이어 흰 천을 깔아놓고 지나가는 이에게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서 역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하니까 이 녀석 더 반긴다. 완전 납치하듯 모셔가더니 한 자 써 달란다. 한자로 휘갈겼다. “한국인韓國人 이범은李範恩”이라고. 그러자 주위의 남녀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글로 써 달란다. 한글로 썼다. “청성에 오니 노자는 보이지 않네!” 자석들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좋다고 환호한다. 꼴에 자기들이 서명 받은 천이 국제화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좋단다. 버스에 올라타면서 갑자기 김삿갓이 송시열宋時烈을 모신 괴산槐山 화양동 서원을 찾아갔을 때 박대를 당하자 분풀이로 써서 던져두고 도망친 글이 생각났다. ‘보지화양동 불알송선생(步至華陽洞 不謁宋先生 - 걸어서 화양동에 이르렀더니 송시열선생은 보이지 않네). 삿갓 어른껜 미안했지만 잠시 빌리기로 했다. ‘보지청성산 불알이노군(步至靑城山 不謁李老君 - 걸어서 청성산에 이르렀더니 노자는 보이지 않네)’ 아차, 백 프로 걸어 오르지는 않았지. 아니, 닷 말 쌀을 들고 가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나도 한마디]
박문송
여산의 글은 몇 줄만 씹어도 배가 불러서리 다들 과식을 조심해야 할 듯......몇 날 며칠 쉬엄쉬엄 차나 마시며 음미해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