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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쟁동이의 명암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11-01-11 오후 8: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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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하의 글은 우리들이 읽으면 누구나 다 아는 싱거운 내용이지만 우리 자녀들 세대가 보면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도 있었구나 할 내용.---
우리 동기들은 대개 1950년 생 아니면 1951년생 말하자면 “전쟁동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49년생도 있긴하지만… 그래서 우린 과도기를 살았고 그 시기의 특징이 있었다. 몇개만 적어본다.

1. 엉터리 생년월일
전쟁통이라 공부(公簿)가 멸실되어 그런지 호적상 생일과 실제생일이 다른 경우도 많다.
이유는 서너가지라 생각된다. 우리부모들은 음력을 많이 썼으니 음력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환산을 잘못한 경우, 전쟁통에 대장이 불타버려 재생하려니 일일이 가정방문을 해야하고 방문해도 사람들이 들에나가고 없으니 (당시 국민의 70%가 농어민이었으니), 한두번 다니다 귀찮아 대충 기억에 의존해 다시 적은 경우, 생일신고가 늦어져 가난했던 시절에 과태료라도 아낄려고 늦은 날자로 신고한 경우, 유아사망율이 높을 때라 제때 신고하면 명이 짧아지거나, 비명횡사하지 않을까하는 미신 등등….
내 경우는 생년월일 뿐 아니라 이름도 바뀌었다. 원래 항열을 따지는 이름으로는 시욱(時旭)인데 호적에는 지욱(志旭)으로 기재되었는데 志자는 내 증손자뻘 항열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양동민속마을인데 그 치열한 전투로 유명한 형산강 바로 북쪽이라 어머니가 나를 밴채로 일곱번이나 국군이 진격하면 집으로 들어갔다, 후퇴하면 안강벌로 나아가 천막치고 했으니 그럴법도…

2. 빈약한 놀이기구, 가난
전쟁직후엔 어느가구나 먹고살기 힘들었고 좀 유복하다는 집도 요새 기준으로 보면 도토리 키재기였다. 우리의 놀이 대부분은 깡통차기, 고상받기, 아니면 말타기였고 공놀이는 꿈도 못꾸었다. 내 경우는 거기다 산에 널부러진 탄피를 주워 엿과 바꿔먹기도 하고 탄피를 돌로 두드리다 손목이 날라간 친구가 양동국민학교 시절에도 있었고, 초등학교 2년 마치고 대구 신천동으로 이사온 후에도 친구중에 탄피사고로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친구도 있었다. 종로국민학교에서 3학년 1학기 다니다 신천국민학교로 전학(구역제 위반으로 누가 찔러 전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니 건물이 반쯤 완성되어 가건물 비슷한 곳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점심시간에 고상받기를 하면 아예 산을 몇개 넘어 오후수업에 안 들어오는 친구도 많이 있었다.
학교에 안 갈때는 연탄배달 구루마를 뒤에서 밀어주고 알바를 하기도 했다.
도시빈민들의 부수입은 주로 화투짝 종이 풀로 붙이기, 아니면 석탄가루에 물을 섞어 숟가락으로 떠 말려 화덕에 들어가는 석탄 알맹이 만드는 일 등등…
시골에 갈 땐 담뱃대에 담배가루를 꾹꾹 눌러 피우는 엽연초 한 봉지가 최고의 선물!

3. 엄격한 규율, 지엄한 도덕율
우리 부모들의 세대는 지엄한 도덕율로 무장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만화가 굉장히 인기를 끌었는데(라이파이, 칠성이 경감,깨막이,엄마찾아 삼만리 등등), 인기만화는 몇질씩 들여놓는 요즘과 달리 인기만화는 한 권을 네편으로 토막내어 돌려가며 읽었는데 그나마 만화가게 출입은 공부방해된다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금지하는 장소 일호였다. 나도 한번 밤중에 만화가게에 있다가 아버지에게 끌려 왔는데 중간에 돌다리에 넘어져 종아리를 다쳤지만 아프다 소리 못하고 나중에 다리에서 고름이 줄줄 나올때야 발각되어 아까찡기를 발랐다.
다 알다시피 아무리 건전영화라도 단체관람 이외에는 극장에 들어갈 수 없었고 선생님들이 영화관에 감시하러 나왔다. 고등학교 때로 기억되는데 친구(아마 이세호로 기억됨) 하나가 영화를(그것도 지극 건전영화를) 보러갔다 들키어 며칠 정학 먹은 걸로 기억하는데 나도 그때 가슴이 서늘하였다. 며칠 전 나도 그 영화를 아버지가 입으시는 졈퍼에 중절모로 위장하고 몰래 봤기 때문이다(아마 “태양의 제왕”이었던 걸로 기억).
요새 흔한 “야동”은 당연히 없었고 최고로 불건전한 출판물은 “방인근”의 소설이었고,
누가 플레이보이지 몇장 찢어오면 그것을 교실 뒤쪽에서 돌려보며 눈이 뒤집혀져 버렸다.
집안이 아무리 어려워도 제사상은 꼭꼭 차렸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제사 지내러 야밤에 다녔고 여섯 살 어린아이라도 12시에 깨워 제사에 참여시켰고 예외가 없었다.

4.그래도 우린 행복했다.
그 때 중학교 입학시험,고등학교 입학시험, 처음생긴 예비고사, 대입시험 등 소위 시험지옥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요새 아이들 학원지옥, 과외지옥 보다는 덜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래도 1,2학년 때는 농땡이를 칠 수 있었으니…
국가경제 규모는 지금과 상대가 안 되었지만 행복지수는 우린 요새보다 나았던 거 같고 우리 몇년 전 세대보다 나았던 거 같다.
우리가 졸업할 땐 적어도 박정희라는 걸출한 지도자 덕에 취직걱정은 안 했는데 요즘 우리자녀들이 대졸 후에도 취업 때문에 고민하는 걸 보면 너무 안스럽다.
또 우리 얼마 전 세대만 하더라도 예컨대 법대졸업해서 고시패스 못하면 중고교 공민교사로 밖에 갈 다른 일자린 없었는데 우리는 손쉽게 소위 “회사”라는 데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땐 그래도 자연이 오염되지 않아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할 수 있었고 우리 초등학교 때만 해도 “용두방천”에 가면 푸른 물 속에 모래가 거울처럼 들여다보이고 송사리가 놀지 않았던가?
또 우리나라 5000 년 역사를 되돌아봐도 지금처럼 50여년 간, 전쟁 혹은 내란이 없는 평화가 지속된 시절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도 곧 환갑, 머지않아 황천으로 갈 나이다. 남은 여생을 의미있게, 보람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한마디]
이지욱 뻔데기와 쌍벽을 이루는 건 메뚜기 맛! 가을에 논에 가,벼 이삭 한줄기를 쑥뽑아 메뚜기를 잡아 등줄기를 꿰어 줄줄이 엮어다 구워먹는 맛! 70년대만 해도 맥주집 최고안주는 바로 이것이었는데 아직 있는지... 홍굴애비(방아깨비)를 잡아다 쌀독에 묻어놓고 한 마리씩 꺼내 구워먹는 재미는 어떻고... 2009-06-30 오후 1:31: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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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영 ...아...꿈에도 잊지 못할 그 맛이여!...여기 한국수퍼에도 뻔데기를 파는데 색깔도 이상하고 맛은 더욱 괴상망칙하다네. 입맛도 물론 변했겠지만 뻔데기도 옛 뻔데기가 아니로세. 하긴 내 전속 뻔데기도 맛이 갔는데 무얼 탓하리오? 2009-06-30 오전 1:47: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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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욱 우리나라가 농정의 실패로 80년도 초반 뽕나무를 다 갈아엎기 전만해도 양잠은 농가의 주요수입이었더라. 신천동 실비시장 입구에 누에고치와 뻔데기를 구분하는 공장이 있었는데 옆집이 만화가게라. 방금 탈벗은 그 따끈따끈한 뻔데기를 씹으며 만화장을 넘기는 맛이란...!!! 2009-06-29 오후 2:34: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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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중관 내사 이시욱보다 李志旭이가 훨씬 낳다.더 지성적이고 의지적이고,이지욱동기의 글을 읽으니 타임머신타고 50년 과거로 갔다 그래서 동기는 타임머신이지 그래서 요즘도 한뫼회회원들은 추억들을 만들고 있지 한30년후에는 타임머신에 많이들 타야 할 텐데 2009-06-29 오후 1:52: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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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근 지욱이의 글은 우리 어릴적의 모습을 너무나 리얼하게 잘 묘사하고 있어 절로 옛 추억에 젖게 하는구나. 나도 동인동으로 이사 간 얼마 후인 신암 2학년 어느날 담임께서 갑자기 지금 당장 동인국교로 짐싸(?) 가라고 해 정든 빤쓰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에 내내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생생하구나. 2009-06-27 오후 8:16: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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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송 나도 종로 3학년 1학기때 동인으로 전학갔는데 지욱이와 인연이 깊네. 집도 신천동(뽕나무밭 부근)이라 신천으로 갈 뻔했는데 당시 신천은 학교가 완전 하꼬방이었지. 울며불며 안 간다고 칠성동 큰집으로 톡꼈더니 동인동에 하숙방을 얻어주더라고...그래도 신천에서 용들이 나온 걸 보면 신기하구먼. 2009-06-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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