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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캄보디아 단편모음 2편
이름   권태인 등록일   2011-11-02 오후 6:03:00
e-mail   tikwon@gmail.com
내용
Episode 2

감춰진 진실
폴 폿
1998년 4월 15일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지대에 있는 한 조그마한 마을에서 크메르 루지의 지도자였던 폴폿이 갑자기 의문 속에 숨을 거둠으로써 20세기에 있어 가장 잔혹했던 사건의 책임자가 사라져버렸다.
폴폿이 캄보디아를 통치했던 1975년에서부터 1979년 사이 약 3년 반 동안 집단 학살, 기아 그리고 혹독한 중노동 등에 의해 전 국민의 3분의 1이 넘는 2백여만 명이 죽어갔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이러한 집단 학살은 사실 당시 소련 공산주의와 미국 팽창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의한 결과로, 베트남에서 있은 미국의 무력 팽창 전쟁의 와중에서 발생한 처절하고도 복잡한 역사의 한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이러한 비극의 역사는 사실 그 내용을 일일이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당시 무조건적인 반공주의 사상을 앞세워 보도가 은폐된 사실도 많았으며 또 캄보디아의 비극에 관련된 미국의 개입을 감추기 위하여 많은 사실이 왜곡 보도되었거나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폴폿의 정치활동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에 이어 프랑스가 다시 캄보디아를 지배하고 있을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농민층으로는 다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폴폿은 1949년에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그는 현재 구금 중인 “이엥사리”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과 같이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였고 또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게 되었다.
1953년 유학을 마치고 프놈펜으로 돌아온 폴폿은 교직에 종사하면서 캄보디아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립 이후 정권을 쥐고 있던 시아누크 왕정의 경찰에 쫓겨 1963년에 결국 프놈펜을 떠나야 했고 그 이후 밀림 속에서 동지들과 공산당의 결속을 굳히어갔다.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배워 온 그는 모택동의 혁명 사상에도 심취하여 밀림 속에서 장래 공산정권의 구성을 위한 정치적 구도를 그리고 있었는데 즉, 스탈린 사상과, 민족주의와 빈곤층의 과격주의 등이 급진적으로 절충된 모택동의 혁명사상과 흡사한 형태이었다.
이 사상은 스탈린 공산주의에 기본을 두되 변질된 특징을 보이는데 즉,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대입한 것으로 사실 마르크스나, 엥겔이나, 레닌 등 어느 것의 사상도 아닌 것이었다.
전형적인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민주주의의 형태로 국가를 지배하는 사회로써,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이기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 마르크스 사회주의 이론은 도시, 지방의 노동자 그리고 인민들의 문화생활 등이 산업, 기술, 과학의 발전과 병행하여 발전된다는 추상적인 전제하에 성립되는 것이다.
폴폿과 그 일당들이 왜곡시킨 마르크스 사회주의 사상은 정말 근거가 희박한 자주적인 발상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초에 방콕의 법대출신이며 폴폿의 동료인 키우삼판은 장래 정책 입안을 하면서 화폐, 문화 및 기타 도시 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폐지하고 농촌 지도자를 위주로 한 사회 구성을 만들었다.
모택동처럼 크메르 루지는 중산계급보다는 핍박받던 빈민 노동자들로부터 더 동조를 받았으며 그 빈민 노동자 계급이 이들 게릴라 군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편파적인 민족주의와 반 지식계급주의, 그리고 도시민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 등이 크메르 루지들이 추구했던 정치 이념이었다.
또 크메르 루지(붉은 크메르-공산 크메르)가 대중 속으로 깊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 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 수백만 명이 희생되고 산업과 농경지가 파괴 되어버린, 미국의 팽창주의로 인해 계속된 인도지나 반도에서의 전쟁이 주원인이었다
당시 시아누크 왕자는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중립주의를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캄보디아 동쪽 영토를 이용하는 월맹의 보급로였던 소위 호치민 루트에 대해 눈을 감았고 동시에 캄보디아 영토 내에서 월맹군과 전투를 하는 미군의 행동에도 눈을 감았다.

미군의 침략
그러자 닉슨 미국 정부는 1970년 4월에 CIA가 배후 조종한 쿠데타를 일으켜 무혈로 시아누크 왕자를 축출하고 론놀 장군(당시 수상)을 대통령으로 앉혔다.
그로부터 1개월 후에 미국 정부는 2만 명의 미군과 베트남 공화국군(당시 남부 월남군)이 캄보디아에 침공하였음을 시인하였다.
캄보디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는데 론놀 정권의 군대는 크메르 루지군과 전쟁을 하는 한편 미군과 남부 월남군은 월맹군과 베트콩들을 상대로 캄보디아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있은 가장 집중적인 폭격을 경험하였다.
1969년부터 1973년 사이 5년간, 캄보디아에 미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투하한 폭탄은 532,000 톤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 본토 폭격 량의 3배나 되었다.
이 폭격으로 적어도 15만 명 이상의 양민들이 죽었다고 하며 발전소, 도로, 교량 등이 거의 파괴되어 버렸다.
지금은 미국이 당시 폭격에 사용되었던 각종 폭탄의 종류, 수량, 투하 위치 등을 캄보디아의 지뢰 및 불발탄 제거반 (CMAC, MAG, Halotrust)들에게 작업 정보용으로 제공하고 있다.
전국에서 계속된 전선(戰線)도, 상대도, 이유도 모르는 전쟁과 양민들의 학살, 무작위 폭격의 충격에 캄보디아의 민간 사회는 비참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1974년 캄보디아 국가 소득의 95%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는데 거의 대부분은 극도로 부패되어 있던 론놀 정권의 고위층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렸다.
당시 7백만 인구 중 2백만 이상이 집과 농토를 잃었으며 년 간 쌀 생산량은 380만 톤에서 65만 톤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많은 캄보디아의 농토는 오늘날까지도 포탄 구덩이와 불발탄, 지뢰 살포 등으로 영농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러한 캄보디아 사회와 국토의 파괴는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과 그의 해외 정책 담당인 국가 안보 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 장관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캄보디아 영토 내의 폭격은, 미국 의회의 승인도 없이 극비리에 불법적으로 행하여 졌다.
이 만행스런 극비 작전이 미국 국민들에게는 비밀일지라도, 피해를 받은 캄보디아인들과 실지로 이 땅에서 전쟁을 수행했던 수천의 미군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지만 침묵을 지켜야 했던 사이공의 기자들에게는 비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로운 중립국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절대로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주어진 합법적인 권한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백악관은 마지막 미군이 베트남을 철수하고 전쟁이 패배로 끝난 1973년 4월까지 캄보디아 내 불법 폭격 사실을 미국 의회에도 보고하지 않았었다.

크메르 루지의 득세
폴폿이 이끄는 크메르 루지가 세력을 급팽창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캄보디아 개입 이후이었는데 1970년에 빈약한 무장에 5천 명도 못 되던 세력이 1975년 4월에는 7만 명으로 병력이 늘어나서 순식간에 론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계속된 폭격, 전쟁과 부패 만연한 정권 하의 혼란으로 도시 경제 뿐 아니라 농촌까지도 모두 파괴되어 버림으로써 크메르 루지는 더욱 화폐경제나 도시 경제의 필요가 없는 순수 노동자계급의 원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그 당시 급진적인 중산계급에서 확산되고 있던 독재적 사회주의에서 진화된 이론으로써 페루의 “센데로 루미노쏘”나 스리랑카의 JVP 단체들이 주장하는 사회 형태와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빈민으로 구성된 크메르 루지 군대로 권력을 잡게 되자 지도자들은 사회주의보다는 독재에 더 가까운 지식층 적대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생활 경제가 마비되기 시작하고 도시의 경제생활은 서서히, 또 의도적으로 혼란되어 갔으며 또 프놈펜을 비롯하여 모든 도시민을 시골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또 유고의 티토가 했던 전 국토 개발을 흉내 내어 현실성 없는 대규모 관개수로 계획을 자랑해 가며 열악한 환경의 강제 노동소에 일반 노동자, 사회 지도층, 공무원, 승려, 상인 할 것 없이 모두 수용하여 중노동을 시켰다.
백여만 명이 혹사와 질병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강제 노동소에서 죽어갔다.
반지식 및 반문화 운동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지식의 부재와 인재의 부재가 발생하자 자연 크메르 루지의 경제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또 그 책임 문제로 내부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차츰 권력 구조가 약해지자 불안을 느낀 지도층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본 따 반동분자 숙청의 명목으로 많은 동료들을 처형하였다.
쇄국적 민족주의 성격이 짙은 이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또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해 계속적으로 공격하였다.
1년이 넘도록 계속 국경지대 및 강가에 사는 베트남 민간인들을 살해하자 하노이의 공산 베트남 정부는 1978년 12월 상당수 과거 남부 베트남군 포로들을 포함한 공산 베트남군을 앞세워 전면전으로 캄보디아 침공을 감행해 버렸다.
그리고는 크메르 루지 정권을 붕괴시키고 지금의 CPP당 원로들인 치아심, 행삼린, 훈센 등을 앞세워 신 정권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묵인- 대량학살
공산 베트남군에 의해 패주,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크메르 루지(민주 캄푸치아)는 당시 강대국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고도 생각된다.
중국은 그 당시 크메르 루지를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 미국의 공산 베트남에 대한 보복심리를 이용하여 당시 “카터” 미국 정부의 동조 내지는 묵인을 받고 중국 남부 국경 쪽에서 베트남을 공격, 중월(中越)전쟁을 일으켰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중국과 미국은 이를 침략 행위라고 비난하였으며 1달 뒤인 1979년 1월 등소평은 황급히 워싱턴을 방문하였고 그로부터 2달 뒤에 평소 복수를 벼르고 있던 중국(미국도 같은 심정이었겠지만)의 백만 인민 해방군이 북쪽 베트남 국경을 침공하였던 것이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하였다고 중국이 베트남을 다시 침략하는 것은 아무래도 명분상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당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미국이었는데 미국은 소련의 원조를 받는 월맹과 싸울 때부터 중국과 친밀한 폴폿이 소련을 상대로 한 냉전 구도에 매우 필요한 협조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을 배후에 업고 중국은 크메르 루지에게 상당한 무기를 공급하였으며 미국과 동맹국인 태국도 중국이 태국 땅을 통하여 크메르 루지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협조하였다.
“키신저”에 이어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 안보 담당 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 장관은 나중에 술회하기를 “나는 폴폿을 도우라고 중국을 부추기었다. 문제는 어떻게 폴폿을 도우나 하는데 있었는데 사실 폴폿은 나쁜 자였으므로 미국이 직접 도울 수는 없었지만 중국은 도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폴폿의 “민주 캄푸치아”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10년이 넘게 유엔에 대표의석을 차지할 수 있게 한 것은 미국을 위시한 다른 친미국가들의 공동 책임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폴폿 정권 이전 미국 CIA의 작품인 론놀 정권은 오히려 왕을 쫓아낸 불법 쿠데타 정부로 비난을 받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베트남 패전의 상처가 다소 아물어가자 '로날드 리건' 미국 대통령은 크메르 루지 정권의 지도자들을 1975 - 1978년 사이 대학살 책임자로 규정하고 중국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막았다.
그럼으로써 미국과 크메르 루지간의 밀월 사실을 은폐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93년 유엔의 지원으로 캄보디아에 민주주의 국가가 새로 탄생되자 크메르 루지 조직의 붕괴와 정부군으로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유엔의 개입 목적은 중국, 라오스, 베트남 및 미얀마 등 인도지나 반도에 유독 많이 집중된 사회주의 국가 및 비인권 국가를 견제하고 또 캄보디아의 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국제 투자자들에게 내 놓는 것이 큰 목적이었으며 그 결과가 2005년 후반부터 캄보디아에서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이후에 크메르 루지 조직은 서서히 와해되어 서열 1위 폴폿의 죽음 이후 많은 자들이 정부에 투항하여 현재 정부군이나 정부 관직에 편입되었고 고위급은 왕의 사면도 받았으며 또 마지막 독재자였던 국방장관 타목의 체포로 결국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져버렸다. 또 서열 2위 눈체아, 3위 이엥사리, 4워 키우삼판 및 툴스랭 고문 책임자 득크 등이 시아누크 왕의 사면과는 전혀 관계없이 국제법에 의하여 체포, 수감되어 국제 사법 심판을 받고 있다.
1999년, 크메르 루지의 내부분열로 폴폿이 체포되자 미국은 그 동안 미루어왔던 폴폿을 전범으로 규정하여 국제 사법 심판에 회부하는 것을 동의하였는데 그 이후 폴폿이 원인 모르게 갑자기 죽자 워싱턴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도 있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연구원”의 교수인 캄보디아 전문가 “스테판 헤더” 씨는 뉴욕 타임즈 신문에 기고한 기사에서 “캄보디아의 이 비극의 역사에는 분명히 미국의 책임이 있다. 만약 전범 재판이 진행된다면 미국도 절대적인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1969년에서부터 1973년 사이에 있은 캄보디아 불법 폭격의 문제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폴폿이 죽자 이 비극의 역사를 주제로 미국의 언론들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는 캄보디아의 비극의 역사에 대한 미국의 관계나 영향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닉슨 미국 정부의 대 캄보디아 정책의 기본 구도는 폭격 문제는 완전히 배제하고 폴폿의 학살 행위와 남은 크메르 루지 지도급들의 국제 사법 심판에 관한 것뿐이었다.만약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면 헨리 키신저도 이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야만 할 것이다.



[나도 한마디]
봉영  간만에 와보니...태인아! 고맙다. 이렇게 훌륭한 글을 올려주어 잘 보고 간다. 킬링필드를 생각하면 이 지구상에 공산주의는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데.. 캄보디아와 베트남, 중국, 러시아, 미국과의 관계가 해골이 복잡해도 우리나라와도 무관하지 않아 자네 글을 계속 관심있게 봐야할 것 같다. 암튼 수고~ 2011-11-04 오전 2:01: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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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 단편모음 2편 2011-11-02 권태인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