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기 때인 1979년 1월 7일의 프놈펜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쾌청한 날씨였다. 중무장을 한 공산 베트남군과 경무장을 한 캄보디아의 “해방군”은 작년 크리스마스 날부터 시작한 전격 침공 작전으로 이날 새벽 이미 프놈펜의 근교까지 도착했다. 크메르 루지로 잘 알려진 민주캄푸치아와 공산 베트남은 지난 한 해 동안은 사실 전쟁 상태에 있었다. 10만이 넘는 중무장한 대 병력에다 기갑부대와 전투기까지 동원한 베트남군들도 너무 빠른 진격에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결국 약 2주간의 대 공세 끝에 캄보디아는 또 다시 깨진 계란이 되고 말았다. 왕궁에서 사실상 자택연금 상태로 지내던 시아누크 왕자는 폴폿의 지시에 따라 유엔에 베트남군의 침략을 호소하기 위해 이미 북경을 향해 떠났고 폴폿을 위시한 민주 캄푸치아의 지도층과 군인들, 그리고 그 일당들도 허겁지겁 기차와 헬기를 타고 프놈펜을 탈출했다. 지난 4년 동안 폭력과 영양실조, 중노동과 잔인한 처형의 공포 속에 살았던, 간혹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베트남 점령군들을 대 환영하고 있었다. 불과 4년 전인 1975년 4월17일에도 이 도시에서는 시아누크 왕자와 동맹군인 폴폿의 공산 혁명조직이 론놀 정권 하의 극심했던 부정부패를 없애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주기를 기대 하면서 - 즉 두 경우 모두 사람들은 평화와 나은 사회를 갈망하며 - 크메르 루지도 그런 식으로 환영했었던 것이다. 오후 늦게 베트남 군들은 프놈펜 시를 완전히 장악했다. 붙잡힌 수백 명의 민주 캄푸치아군 포로들과 미처 도망하지 못하고 시내에 숨어있는 S-21소속 대원들을 포함한 일부 패잔병들을 제외하고는 시내는 텅 비어 있었다. 1975년 4월 민주 캄푸치아(크메르 루지)가 프놈펜을 점령한 뒤에도 프놈펜은 계속 캄보디아의 수도로 남아있었지만 공무원, 군인, 일부 공장 노동자 등 5만 명을 넘지 않는 사람들만 프놈펜에 살고 있었고 시장도, 가게도, 학교도, 절도, 기타 어떤 공공시설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 외교관들을 위한 조그만 생필품 창고가 하나 있었을 뿐이다. 프놈펜 시내의 모든 공장, 작업장, 군부대, 정부 기관 등은 철조망으로 겹겹이 둘러 싸여있었고 잘 다니지 않는 많은 도로들은 철조망으로 막아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도로 표식은 모두 페인트로 지워 버렸었다. 공터에는 모두 바나나 나무를 심어 두었고 1975년 론놀의 크메르 공화국이 패망한 뒤 버려진 차들이 녹슬어 방치되어 있었고 텅 빈 집들에서 노략질한 냉장고, 세탁기, TV, 전축, 타자기 등과 종이조각들, 가재도구, 못 쓰게 된 론놀 정권 때의 지폐다발들이 아직도 길에 나 뒹굴고 있었다. 1979년 1월 7일 프놈펜에는 사람도, 개 한 마리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1975년 때처럼 캄보디아의 정부는 또 한 번 없어져버려 다시 “Year Zero”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극도로 황폐해 버린 프놈펜의 풍경에 침공한 베트남군들과 캄보디아 “해방군" 들도 놀랍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55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하노이로 건너갔던 캄보디아 고참 공산당 출신 “체이 사폰”은 이 때 47세의 나이로 기자가 되어 베트남군을 따라 프놈펜으로 왔다. (제네바 협정에 캄보디아 공산당들은 전향하지 않으려면 베트남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 가서 살게 되었었다) 25년 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고향을 찾은 체이 사폰은 폐허의 프놈펜을 보고 오후 내내 울기만 했다고 한다. 다음 며칠 동안 베트남군들은 프놈펜 시내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기자 두 명이 1월 8일 수색대를 따라 다니다가 한 건물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해서 그 곳을 들어가 보기로 했다. 건물은 2중으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어 중요했던 건물 같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전형적인 학교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툴 스베이 쁘레이” 동네의 남쪽 끝이었고 정문 위에는 “혁명정신을 사수하자! 적의 정책과 전술로부터 스스로 방어하여 국가와 민족과 당을 지키자!” 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지만 다른 표식이나 명칭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운동장이 펼쳐지며 ㄷ자로 앉은 흰 회칠을 한 3층 건물 4개와 잔디밭을 마주보고 있는 단층의 목조 건물 한 동이 나타났다. 목조 건물 안에는 서류들과 사무집기들이 나뒹굴고 있어 사무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쪽 끝의 건물 아랫방들에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이 나 뒹굴고 있었는데 모두 목이 잘려 있었고 바닥의 선혈은 아직도 축축했다. 모두 14구의 처형된 시체들이 건물 안에 있었으며 죽은 지 2-3일이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2층은 큰 교실이었는데 쇠사슬과 채찍과 발목을 묶는 족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3층은 벽돌로 좁은 공간을 만들어 죄수들을 가두게 되어 있었다. 방안에는 철제로 된 미제 M-16 탄약통들이 있었는데 아직 배설물들이 담겨 있었다. 두 베트남 기자들은 모든 방들을 사진 촬영을 하고 점령군 지휘부에 보고를 했다. 그 이후 약 2주간의 수색에서 인근 가옥에서 수천 장의 민주 캄푸치아 문서들과 사진, 필름 그리고 책자들을 발견했다. 또 정문 앞의 가옥에서는 폴폿의 흉상을 만들던 주물도 발견했다. 베트남군들은 민주 캄푸치아의 아주 중요한 증거물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14구의 시체는 베트남군들이 수습하여 마당에 묻어 주어 아직도 그 묘가 남아있고 그 처참한 사진들은 확대하여 각 방에 걸어 두었다. 또 이 건물의 이름이 S-21이었음을 서류에서 발견하였는데 S의 뜻은 아마 캄보디아어의 “싼띠썩"(보안)과 ”노꼬발“(경찰)의 합성어인 ”싼떼발“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싼떼발”이야 말로 민주 캄푸치아 시대에 무시무시했던 공포의 보안경찰 이름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 시아누크 왕자가 캄보디아를 다스릴 때 이 중등학교를 세워 이름을 “뽄헤아 얏” 학교라 했는데 프놈펜에 도읍을 했던 왕의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 론놀의 쿠데타로 시아누크가 축출, 망명하자 학교 이름을 동네 이름을 따서 “툴 스베이 쁘레이”로 바꾸었는데 야생 망고나무의 언덕이란 뜻이다. 그리고 같이 옆에 붙어 있는 초등학교는 이름을 “툴 스랭”학교라 했는데 스랭 나무의 언덕이란 뜻이었고 나중에 이 형무소가 박물관이 되고는 “툴 스랭”이란 이름으로 통일이 되고 말았다. 스랭 나무 열매에 독이 있기 때문일까. 암호명 S-21은 1975년 9월의 크메르 루지 문서에 처음 등장한다. 그 이후 9개월간, 즉 S-21이 제대로 가동되기 시작한 1976년 5-6월까지 이 보안경찰대는 프놈펜에 몇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남쪽에는 타크마우 마을에, 25지역에, 그리고 시의 북쪽 등에 하나씩 보안경찰대가 있었다. 1975년 말에 이 보안 경찰대는 하나로 통합이 되고 책임자로 캉껙이우(드크)가 임명되었다. 중국인인 드크는 전직 물리학 교사 출신으로 내전 당시에는 프놈펜 북쪽에 포진했던 특수부대의 보안 담당이었다. 드크가 S-21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1976년 6월부터이며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할 때까지 책임자로 있었다. 툴스랭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차린 베트남은 1월25일부터 이곳의 출입을 통제하며 캄보디아인들의 협조를 받아 정리하였다. 행삼린이 국가 주석으로 앉은 새로이 들어선 정부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PRK)의 수립 기념일에 동구의 언론인들이 캄보디아를 방문하였고 때에 맞춰 베트남은 이곳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쿠바의 기자 미구엘 리베로는 아직도 마루바닥에 선혈이 그대로 남아있어 피 냄새가 역겨웠으며 수천 마리의 푸른 파리 떼가 방에 모여들었다고 기사를 썼다. 얼마 뒤인 1979년 2월에 캄보디아 말에 유창한 베트남군 대령 “마이 람”이 프놈펜에 도착했다. 그는 또 법에도 밝았으며 툴스랭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일과 이곳을 “캄보디아의 악몽 전시관”으로 만드는 일을 맡았다. 우선은 문서자료의 정리가 더 시급했다. 이 자료로서 폴폿과 이엥사리를 대 학살의 주범으로 고소할 수 있는 증거로 하여야 했다. 사실 중요한 증거는 나중에 증인들의 진술에서 거의 나타났고 고문에 의해 진술, 작성된 툴스랭의 문서들은 베트남이나 새 정부가 바라던 만큼의 증거는 되지 못하고 말았는데 즉 폴폿이나 이엥사리가 직접 연루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당 중앙부 운운하는 문구만 나와 있었다. 마이 람은 호치민시에 전쟁 박물관을 만든 장본인으로 미국의 전쟁 범죄에 관한 증거를 잘 정리, 만들어 놓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자부심과 의무감을 갖고 툴스랭 전시관의 작업에 착수했다. 또 프랑스와 싸웠던 제 1차 인도지나 전쟁 때에 캄보디아에 와 보기도 했던 경험이 있어 캄보디아에 대한 애착이 남달리 있었으므로 더욱 사명감을 가졌다. 그는 또 말하기를 “폴폿과 이엥사리의 범죄를 이해하려면 우선 캄보디아 사람들과 이 나라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 툴스랭을 전시관으로 만들면서 마이 람은 신생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과 동맹국인 베트남에 명분상, 또 장기적으로도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역사상 필요한 캄보디아의 최근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폴폿-이엥사리의 집단 대 학살의 장본인들도 캄보디아인들이었기 때문에 호치민시에 만든 미국을 비난하는 전쟁 박물관과는 성격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짜집기를 시작한 캄보디아의 최근 역사는 캄보디아 공산당의 지도자들과 사회주의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하고 전시관의 방향을 폴폿의 민주 캄푸치아(DK)와 이 툴스랭의 잔학성을 직접 연결하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직접 비유할 수 있게 만들어 나갔다. 그래서 S-21과 아우슈비츠의 비교는 잔학성과 죽음의 공포 등의 연결은 성공을 하였지만 더 이상의 깊은 내용은 표현하지 못 했다. 툴스랭에서 살아남은 12명 중 하나인 “웅빽”이 1980년 전시관을 공개하기 시작하자 첫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마이 람과 같이 프랑스, 소련, 동유럽 등을 여행하며 나치의 수용소 전시관들을 둘러보았다. 마이 람은 1988년까지 캄보디아에 상주하면서 이 전시관을 계속 다듬었는데 그는 툴스랭 전시관을 캄보디아의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계속 다듬어 나갔고 베트남이 개입한 흔적을 애써 남기지 않았다고 1990년 인터뷰에서 주장을 했다. 이후 수개월 동안 마이 람과 그 일행들은 툴스랭 감옥의 역사와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수용일과 처형 기록, 감옥 실무자들의 기록물 및 생존자들의 기억 등을 정리해 나갔다. 1975년 4월의 프놈펜 함락에서부터 1979년 1월의 첫 주까지 결국 이 감옥에서 적어도 14,000여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 노인 등 많은 사람들이 잡혀오고 고문당하고 처형되었음을 발견하였는데 1978년의 몇 개월간은 기록이 없었으므로 실제 숫자는 사실 14,000명을 훨씬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마지막 생존자 12명을 제외하고는 다 처형되었다. 그 중 7명의 생존자가 나타나서 진술을 해 주었다. S-21의 기록에 의하면 낮은 계급의 수감자들은 며칠에서 몇 주 내에 모두 처형되었었고 높은 계급의 수감자나 심한 반동의 경우에는 몇 개월간의 취조를 거친 후에 처형되었었다. 수천 명의 수감자들은 그들이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취조를 받았고 준비된 각본에 의해 진술을 하고 서명을 해야 했다. 또 그들의 반동행위를 인정하고 다른 관련자들의 이름을 반역자들의 조직망이란 제목으로 무조건 밝혀야 했다. 어떤 진술서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진술서는 한 장부터 수백 장까지 있었고 크메르 루지들이 도망가면서 많이 태우기는 했어도 모두 4300명의 진술서가 입수되었다. 그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만한 민주 캄푸치아의 고위직 사람들도 많이 섞여있었다. 진술서, 증언, 감옥내의 시설 등을 종합하면 S-21에서는 매우 지독한 고문을 수감자 거의가 다 당하였음이 입증되었다. 그런 고문 속에서도 몇 몇 진술서에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 사례도 있었다. 이들은 체포되는 순간부터 죄가 있다고 인정되었는데 캄보디아 말에 잡힌 자를 재판이나 심문을 받기 전에도 “네악또스”라고 부르는데 바로 “죄인”이란 뜻이다. 수천 명의 수감자들은 그들이 처형되기 전에 모두 그들의 죄를 자백하고 진술서를 남겨야 했었다. 이러한 절차는 18세기 프랑스의 폭력정치 때와 1930년대 스탈린의 대 숙청 때 꾸며진 공개재판 같은 것이었고 또 1940년대 중국의 토지개혁과정 및 전후 베트남의 재교육에서 볼 수 있는, 폭력혁명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공정한 재판을 거쳤다는 것을 남기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다. 캄보디아의 S-21에서의 100% 유죄 및 100% 고문 및 사형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또 S-21에서의 지독한 고문과 취조관들의 악독함은 잡힌 자는 절대로 무죄가 될 수 없고 왕권(통치자)을 거역하는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했던 역사상 캄보디아의 형벌주의를 그대로 답습,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주 캄푸치아의 사회정책이나 경제가 국가 사회주의인 파시즘과는 맞지 않았지만 S-21과 나치 형무소는 같은 형식이었다. 학살을 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감옥 내에서 고문, 취조 등의 정신적 고통을 먼저 피해자들에게 주었는데 가장 최근의 이러한 예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볼 수 있는 “추잡한 전쟁”의 결과이다. 나치와 캄보디아의 경우에 가장 뚜렷하게 다른 점은 나치는 유태인이나 죄수들을 처형하기 전에 단순 노동만 시켰지만 S-21에서는 고문을 통해 진술서를 만들고 서류들을 작성하여 마치 수감자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검찰 진술을 받거나 취조관들이 증거를 재판정에 회부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1930년대 러시아에서 반혁명분자들을 취조했던 과정과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독일에서는 정치적 죄수들은 별도 수감하고 처형 일까지는 잘 대해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S-21에서는 모든 죄는 정치적 반역이었고 모든 처벌은 사형이었다. 나치의 처형장이나 아르헨티나의 고문실과 같이 S-21도 비밀 장소였지만 죄수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비밀이었던 것은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1979년 3월부터 외국인에게만 방문을 허용하기 시작하여 1980년 7월에 내국인의 방문도 허용하자 1980년 10월까지에 3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이 곳을 찾아 소식이 끊기거나 잡혀갔던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외국인도 11,000명이 다녀갔다. 또 1980년 초에는 프놈펜 인근 교외 “쯩액”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집단 학살 현장(킬링 필드)을 발굴하여 그 유골들을 모아 위령탑을 세웠다. 이 비참했던 현장이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연일 구경을 오는데 남의 아픔을 즐기려는 인간의 다른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밝지를 못하다.
[나도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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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단편모음 6편
2011-11-09
권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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