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병언은 “꿈 같은 사랑”이란 시집을 출간하고, 비참하게 죽으며 그 책을 가슴에 앉고 죽었다 한다. 나는 “피보다 진한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내가 고딩 1년 시절 4월 어느 날. , 하루는 옆집에 사는 오성교교 2년생인 김 모군이 “같이 교회에 가자. 거기 가면 예쁜 여학생도 만날 수 있다”며 꼬득였다. 나는 망서렸다. 나는 초등 1년 시절 고향 양동에서 거기 유일한 교회 옆을 지나며 “예수 꼬랑대기 땡겨라! 목사 x땡겨라”라는 노래를 혼자 걸으면서 한껏 목청 높여 부르고 지나가는데, 갑자기 교회 문이 열리며 어떤 아주머니(목사 부인이었던 듯)가 나를 들어오라 하더니 교회 안에서 “그 노래를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 “언제부터 불렀느냐”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가 가르쳐줬는지도 모르고 애들이 학교에서 부르길래 따라 불렀는데, 내 지금 생각에 아마 지독히 안티 크리스챤이었던 양동이씨 마을이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것을 작사,작곡해 애들에게 퍼뜨린 것 같다. 아무튼 내가 교회에 감금(?)되었던 공포의 시간이 얼마 지났는지 기억 안 나지만 나는 마침내 풀려났다. 그 때 공포의 기억이 10년이 지난 그 때까지 남아 나는 한참 동안 주저주저 망서렸으나 나의 내적 갈등은 마침내 “예쁜 여학생”이라는 Irresistible and Fatal Temptation 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대구 동신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진짜 예쁜 여학생도 가까이할 수는 있었지만 Something은 없었다. 그러던 차 여름방학이 되었는데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나는 당시 악필이었음에도 주보등사 발행일을 맡았는데, 당시 주보를 인쇄하려면 “가리방”이라 부르는 철판에 초를 입힌 특수용지를 얹고 그 위에 철필로 글을 쓰면 글 쓴 부분만 초가 벗겨지는데 그걸 등사판에 고정시키고 롤러로 밀면 인쇄가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바빠 교회서 할 일을 집에서 하느라, 그 가리방을 집으로 가져 왔었는데 교회에 도로 갖다 놓는 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리방을 쓸 일이 있었던 여학생들 몇이서 그 가리방을 찾으러 우리 집에 들렀다. 그런데 지금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인데 그 일이 누나들 때문에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욱이를 찾으러 왠 여학생 셋이서 교회서 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 경천동지할 일이라 여기신 듯 … 하기야 여학생과 빵집에 같이 간 사실만 들켜도 정학감이었던 세월 아니었던가?...... “이 놈이 하란 공부는 안 하고…….”라며 나를 맹렬히 추궁하셨다. 나는 당연히 “나는 무죄! 하늘을 우럴어도 땅을 굽어봐도 순결!” 나는 내가 은근히 맘에 두었던 여학생이 나를 본 척도 아니하는 바람에 사기 침체 되어있던 상황이라 아버지의 억울한 공격에 더더욱 화가 났다. 그로부터 나는 반항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모든 “바른 질서”가 내게는 삐딱하게 보였다.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양반의 후예” 그것도 내게는 다 말아먹고 찌들리다 찌들려 목숨을 연명하는 “양반 찌꺼기”로 보였다. 5살 때부터 통금시간을 불사하고, 혹한을 불사하고 따라다닌 제사참례도 허례허식으로 보였다. 그때부터 이유없는 반항을 시작하였다. 수시로 시청 뒤에 있던 술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금지영화도 보고, 무전취식 등등……. 그 때 시청 뒤 술집에 가면 막걸리를 시키면 생고구마, 삶은 콩,그리고 다른 한 가지 안주가 공짜로 나왔다. 내 반항은 한 2년 후 끝났다. 그 반항은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다. 나는 소위 좋은 학교,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소학교만을 졸업한 아버지의 행동거지, 생활규범, 일가친척 등에 대한 관계, 언어의 품격 등에 비하면 그 3분의 1도 못 미친다. 그런데도 왜 그 때는 “안 그런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그 일로 아버님은 얼마나 속 상하셨을까? 회고하면 불효막심하고 한심하다. 그런데 10대에 반항기를 안 겪은 사람은 나중에 40/50/60대에 꼭 한번 일탈된 행동에 빠진다고도 한다. 그러니 동기들이여 자녀들에게 주지시키시라! 각설하고 그때 즉 고딩 1때 술을 마시면 나와 어울리던 사대부고 2년생, 경고 2년생, 계고 2년생, 대구상고 2년 생 중 한 사람이 유독 아래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아마 “사연이 있었음직도…..” 그래서 우리는 즉시 “피보다 진한 사랑…여자는 모르 리이라”를 “피보다 진한 막걸리…진로는 모르 리이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그 때는 진로는 값이 비싸 우리 막걸리 파들의 경원 대상이었다.
[나도 한마디]
권태인
아! 옛날, 진해에서 나는 상사, 상희는 중위, 문경연 소위, 권후열 소위 등등 진해에 유행ㅎ했던 위스키 시음장 가서 난동을 지기면 경찰은 와서 영감님 ! 하고 도망가고 헌병이 오면 충성! 하고 도망가니 그때 술집 주인 인상이란 ...
여기서 더 용감, 진취적, 자유분방했으면 나라가 아니 세계가 시끄러울 뻔했다. 근데 웬 불효자? 고관대작이 못 된게 부모님께는 죄송한 건가? 손자녀들에게 출세지향적인 인간이 되지 말라는 취지의 말에는 나도 동감이네. 다행히 우리 친구들 중에는 그런 유형은 없지 아매.. 상희가 장관제의를 거절한 것만 봐도...
내가 한때 전교에서 3등까지 한 원조 쿵후파였다는 걸 믿어주는 동기들이 없듯이 지욱이가 주로 시청 뒤에서 피보다 진한 원조 막걸리파로 놀았다는 것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다. 지욱아! 믿거나 말거나 그러고도 서울법대는 우째 붙었으며 김상희도 다 하는 검사는 우째 하기 싫어 삼천포로 빠졌는지 난 그게 궁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