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꿈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자꾸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 내가 마음부터 늙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문송이가 “나그네 설움”을 글마당에 올렸을 때 나는 제일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님은 그 연배의 어른들이 비슷하겠지만 평소에는 노래 부르는 모습을 한 번도 내가 본 일이 없었다. 딱 한번 회갑연 때 주위의 강권에 못 이겨 노래를 한 곡 부르셨는데 바로 “오느~ㄹ 도~ 걷는다 마~는…..”이었다. 그 때 눈시울이 젖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는 그 뒤 참 궁금하였다. 대체 어디서 아버지는 저 노래를 배웠고 부르셨을까……? 그런데 그 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나서 우연히 술자리에서 아버지가 고향친구에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시골(양동)에서 대구로 오셨는데 농사를 지으시다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건설 노가다판 밖에 없었다. 건설현장에서는 특정 기능이 없는 노무자들을 “잡부”라 부르고 잡부들이 하는 일은 질통에 모래나 자갈을 채우고 이것을 비계라 부르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운반하는 일이다. 아버지는 이 잡부 일을 수년간 하시면서 고단한 몸을 달랠 때 이 노래를 부르셨다 한다. 시골에서는 그래도 배를 주릴 지 언정 “양반”흉내는 내며 살았고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구리 헤엄은 안 친다”는 신조로 사셨는데 도회지에서는 입에 풀칠이 중요하지 체면은 챙길 틈이 없었다. 당시에는 담배 생각이 나면 어디 꽁초라도 버린 게 없나 늘 공사장 주변을 살피셨다 한다. 회갑연 때 이 노래를 부르시면서 아마 고단했던 삶이 생각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학력은 보통학교(초등학교) 5년 중퇴이다. 나는 중학교 때 가정환경조사를 써넣을 때마다 아버지,어머니의 학력이 변변찮은 게 늘 부끄러웠다. 그런데 나중에 족보 책을 뒤지다 보니 할아버지의 작고 년도가 아버지의 보통학교 중퇴 년도와 일치했다. 즉 아버님은 13세 때 졸지에 어린 남동생과 누이 둘을 부양하는 소년가장이 되신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가 태어나기 전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농사를 지었는데 일제 말년에는 징병을 피하여 만주로 가서 이불장사를 하셨다 한다. 내가 국민학교 1,2 학년 때는 시골에서 정미소를 하셨는데 불이나 홀랑 날리고 방황을 하신 것 같다. 나는 어머니가 놀음 방에 있는 아버지를 모셔오라 시켜서, 두어 번 시골 노름방에 간 일이 있는데 문을 열자 말자 좁은 방에 가득 찬 담배연기를 맡고 질식할 뻔했다. 그래서 두 번 이후로는 가지 않았다. 그 당시 어머니는 시골에 그냥 있어서는 아이들에게 미래가 없다 생각하시고 과감히 도시(대구)로 가자고 주장하셨는데 아버지는 그래도 논 몇 마지기라도 있는 농촌이 생존에 유리하다 주장하시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모진 결심을 하시고 작은 누나를 데리고 먼저 대구로 가셨다. 남은 식구들의 식생활은 이제 당시 17세이던 큰 누나의 몫이었다. 나는 어느 날 큰 누나가 바가지에 쌀 반 바가지를 친척집에서 얻어와서 방바닥에 놓고 한없이 우는 광경을 목격했다(쪽박 찼다는 말이 이런 경우이리라). 누나는 밤이 되면 마루에서 달을 보며 구성진 노래를 불렀다. “복남아 울지 말고 어서 자거라. 네가 울면 내 눈에선 피가 흐른다. (중략) 반 공중에 슬피 우는 종다리 새야 너는 무슨 회포 있어 그리 우느냐? 복남아 우리 둘도 함께 울자 년년옥로(玉露?) 문전걸식 이내 신세여” 아마 무슨 동냥 패들에게서 배운 노래 같은데 그 때는 동냥 패들도 이런 노래를 작사작곡 할 교양을 갖추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아버지도 대구로 합세하여 일곱 식구가 신천동(당시 대구에서 최고 빈촌) 판자촌에서 방 한 칸을 세 얻어 살았는데 아버지는 노가다 막노동, 어머니는 칠성시장 노점에서 국수를 말아 파시고, 다른 식구들은 화투장 풀칠하기(당시엔 요즘처럼 코팅 식 화투가 아니고 종이로 뒷장을 대고 앞을 말아 붙였다), 조개탄 만들기(연탄가루를 물에 개어 숟가락으로 조개처럼 떠서 만드는 연료) 등으로 연명했다. 나도 당장 학용품 살 돈도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산동네에서 연탄 리어카 밀기 보조 등으로 몇 달을 보냈다 (나중에 종로 국민학교 3년에 편입되었는데 동네 아이들의 밀고로 쫓기어 신천국민학교에 전입). 또 바케츠 두 통에 신천에서 물을 가득 담아 나무 지게로 언덕 위 집까지 생활용수를 져다 나르는 일은 내 몫이었다(힘이 딸려 여러 번 물을 엎지르기도 했다).( 그 당시엔 신천도 고향의 형산강도 그지 없이 맑았다).또 동네 어귀에 있는 우물(당시 기분으로는 깊이가 100m는 되지 싶을 정도로 엄청난 깊이였다)에서 물을 길어 져다 나르기도 했다.(요즈음 아프리카에서 아동 노동이 문제되고 있지만 당시는 우리나라도 노동에 종사하는 아동이 많았다). 한 시간 동안 물긷는 일을 마치고 언덕을 두어 개 또 뛰어넘어서 학교에 갔는데 당시 신천국교는 교실도 제대로 없었다. 아버지는 신체는 비교적 건강하셨지만 날씨가 궂으면 관절통,신경통으로 신음하셨는데 거기엔 까닭이 있다. 6.25 사변 전 면장을 하셨는데 고향인 양동은 안강 평야 맞은 편에 있지만 산을 끼고 있고, 산은 조금만 북상하면 태백산맥에 연결되어 사변 전에는 좌익의 발호가 심한 곳이었다. 어쩌다 면장을 맡게 된 아버지는 밤이면 빨치산을 피해 다락 방에 작은 창문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통해 월장해 피신하셨고, 낮에는 경찰을 피하느라 바쁘셨다. 그러다 큰 사건이 터졌는데 1946년 대구 폭동 사건이 일어나자(이 사건은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좌익의 계획적인 사건임이 나중 스티코프의 비망록으로 밝혀졌다) 월성군 등 대구 주위의 몇 개 군,면의 농민들이 동조시위를 일으켰다. 당시 아버지는 시위대 맨 앞쪽 근방에 있었는데 경찰지서에서 새끼줄을 쳐놓고 그 저지선을 넘어오면 발포하겠다고 방송하자 뒤쪽에 있던 좌익 행동대원들이 뛰쳐나와 군경을 참살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하셨다(이후 아버지는 좌익과 벽을 쌓으셨다). 곧 포항에서 장갑차가 출동하고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다. 시위대들은 갈가마귀 떼처럼 흩어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총상을 입고 죽었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고 안강 철교 밑에 늘어진 시체들을 헤매고 다녔다. 나중에 아버지는 붙잡혀 심문을 받았는데 무차별 몽둥이 타작과 사정없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내 자술서 서명에 불응하셨다. 이 때 잡힌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는데 유일하게 두 사람만 살아남았고, 그 중 한명인 아버지는 자술서에 서명 하지 않아 사셨고, 다른 한 사람은 총살 형장으로 끌려 가다가 유도4단의 실력으로 경관을 제압하고 월북도주 했다. 아버지는 풀려나셨지만 혹시 다시 체포되실까 봐 고모 집 마루 밑에 토굴을 파고 1년 동안 숨어 계셨다. 아버지는 소년가장 때 동네의 설움을 받아 가며 독학을 해서인지 관혼상제 문제에서는 누구도 딸아 갈 수 없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양동은 소위 양반동네라 이 방면에 내로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선원할배”(아버지의 택호)가 한 마디 하면 수그러졌다. 그러면서 딱딱한 원칙만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이 제도는 이러이러한 연유에서 발생한 제도이니 여차여차한 예외는 인정된다”며 유연성을 보이셨다. 한문 실력도 상당하여 내가 결혼 후 누군가가 병풍을 선물로 가져 왔는데 한쪽에는 그림, 다른 쪽에는 도연명의 시를 초서로 쓴 글씨가 붙어있었다. 나는 초서라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몇 안되었는데 아버지는 쓰윽 한번 보시더니 중간에 한 자가 빠졌다 하셨다. 선물을 가져 온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사방에 전화를 하고 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게 증명되었다. 아버지가 언제 도연명의 시까지 외우고 계셨는지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아버지의 보통학교 동창생 중 한 명이 보통학교 때 일본인 담임 선생이 자주 아버지를 칭찬하시면서 “수바라시!(대단하다)”라 했다는데 보통학교에서 도연명의 시를 가르칠 리는 없고…. 늘 굶주리면서도 사람은 “의관을 정제”할 줄 알아야 한다며 제사 때면 한복을 다려 입고 중절모를 쓰고 야간 통금을 무시하고 나를 끌고 큰집으로 다니셨는데 제사 일이 하필 한겨울이라 나는 발이 시려 늘 발을 동동 굴렀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몇 년 하시던 아버지는 그 후 십장, 목수, 대목수를 거쳐 나중에는 대구에서 몇 안 되는 名匠반열에 올라 어려운 공사를 도맡아 하셨지만 건축업을 창업한 후 모 학원 건물을 짓다 공사대금을 몽땅 떼이고 건축 일을 접으셨다. 남에게 화내거나 쌍욕 하는 걸 들은 적이 없고 최고의 욕이 “고이헌 놈” 아니면 “싱거운 놈”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씻을 수 없는 불효를 큰 것만 세 번을 저질렀다. 첫번 째는 내가 고 2때…. 1,2학년 동안 큰 탈선을 했던 나는 결국 매 월마다 뚝뚝 떨어지는 성적을 감출 수 없었고, 결국 경북중고 내에서 구내매점을 하던 큰 누나(시어른이 경북중 수학 선생님을 하다 일찍 은퇴해 매점을 하셨다)를 통해 어머니,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좀처럼 않던 체벌을 내게 가하시며 우산대로 종아리를 치셨는데, 도중에 나는 우산대를 탈취해 분질러 버리고 그 길로 집을 나가 며칠 째 집에 안 들어가 버렸다.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념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만일 내 아들이 똑같이 내게 종아리를 맞던 매를 빼앗아 분질러 버리고 노려 보다가 집을 뛰쳐나갔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나는 영영 자식 취급 않고 족보에서 빼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중에 집에 들어왔어도 아버지께 사과 드리라는 어머니의 권고를 무시하였다. 아버지는 그 뒤 묵묵히 말씀이 없으셨다. 속으로 싹이셨을 그 분노가 어떠했을까……. 두 번 째는 결혼 문제였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당시 대구에서 알바를 하던 여수출신 아내와 좋아져서 마침내 결혼을 결심했는데 양가 모두 반대하는 난관에 부딪혔다. 며칠 고민하던 나는 당시 다니던 대우실업에서 직원들이 다 퇴근한 후, 미리 사 둔 엽서에 청첩 타이프를 쳐서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에서 결혼한다는 사실을 기재하고 친지들에게 돌려버렸다. 아버지에게 협박을 한 것이었다. 참가 않고 친지들에게 욕을 먹든지 강제로 참가 하시든지…. 결국 아버지는 내 겁박에 못 이겨 참가하셨지만 서울에서 예식을 마치고 대구로 가는 통일호에서 소주로 쉴 새 없이 통음을 하셨다 한다. 세 번 째는 내가 사업한답시고 홀랑 털어 먹은 후에 성남 산 동네에서 월세 집에서 살 때 하필 돌아가신 일이었다. 빈곤에 처한 아들의 고생길 최 막장에서 운명을 달리하신 것이었다. 나는 집사람의 전화를 받고 후딱 뛰어갔지만 이미 운명하신 후였다.(하긴 불효자식에게 하늘도 임종을 허락하실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옆에서 운명을 지켜보았던 아내에게 보자기 하나를 맡겨 놓으셨는데 그걸 열어보니 장례식에 필요한 모든 것—옷가지, 굴건, 상주가 입을 옷 등등이 국민의례준칙이 아닌 옛날 조선시대 법식대로 다 만들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소년 가장이 되었을 때 변변히 상례를 못 차려 빈축을 받던 경험을 자식에겐 대물림 하기 싫으셨던 것이다. 그 몇 해 전에 아버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시절이 수상하던 시절에 기계마을 동네 뒷 산에 매장했던 할머니 묘소를 안계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로 옮기자 하셨다. 나는 사업이 부도가 난 직후라 재정적으로 여의치 않다 했더니 어디서 틈틈이 저축을 해 놓으셨던지 상당한 금액을 내 놓으셨고 그걸로 이장 절차를 마친 일도 있었다. 아, 어영버영 세월허송 하던 불효자식이 제 죽을 때가 임박해서야 아버지가 큰 산이었음을 알게 되네요. 그러나 이제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아버지! 이 불효 막심한 놈을 부디 용서하시옵소서!
하기사 나한테 언감생심 보드카 몇 병은 무리겠지.. 근데 술을 옳키 못 마신다는 건 좀 억울하네.. 운선 자네는 늘 초장에 왕창 마시지만 나중에는 헬레레~.. 난 조금밖에 못 먹어도 고~ 언제나 느긋하게 오~래 먹지.. 생각해보게나. 옛날 우리 친구들 한창 술마시고 다닐 때 주로 누가 자네 뒷바라지를 했는지...ㅋㅋ
지욱아! 지욱아! 잘 있나? 오늘도 자네의 캐릭터가 물씬 풍기는 이 글을 읽어보니 뭐라고 하고싶은 말은 잔뜩 많은데 막상 댓글로는 적당한 말이 아닌 것 같군.. 그냥 맴이 찡~하다는 말로는 약간 낯간지럽고 어지럽고 어색하고.. 영 성이 차질 않구만.. ㅋㅋ 언제 함 만나서 보드카 몇 병은 비워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