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내용보기]
제목   배신과 변신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15-07-22 오전 11:19:00
e-mail   lee.jee.uk.wgs@gmail.com
내용
지난 달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운운하며 유승민 원내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한 때 “배신”이 내외의 화두가 된 때가 있었다.
배신!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선 공공의 적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정치문제를 논하며 언급할 언어로선 적절치 못하다. 일국의 지도자라면 조조처럼 “내가 천하를 배신할 지언 정 천하가 날 배신하는 건 용납 못해”라는 스케일이 필요한 것이지 여당지도부를 “배신”으로 몰아세우는 건 누워서 침뱉기이다. 물론 GH개인으로선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의 배신이 뼈에 사무쳐 “배신”의 의미가 남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박정희가 만년에 총명이 흐려져 김재규, 차지철 같은 인물을 주위에 둔 탓이지 남을 탓할 일만은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번 통절한 “배신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전지전능하신 神性을 가지고 태어난 예수님마저 한 제자에게 배신당해 십자가 형을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국인들은 땅덩어리가 좁아서인지 유달리 DNA에 협량기질(狹量氣質)이 있다. 배신이 아니 것도 툭하면 배신으로 몰아 세운다. 심지어 재벌회사 중에는 직원이 이직을 해도 배신으로 간주하여 재입사를 허용 않는 경우도 있다. 後生可畏, 靑出於藍, 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치고 나가는 건 자연의 이치! 그런데도 키워준 사람에게 반대논리를 펴면 “짜아식 내게 대들어? 많이 컸네”라고 배신자 취급을 한다. 정치세계도 마찬 가지! 한번 우두머리 뒤에 줄을 서면 끝까지 붙어 있어야지 아니면 배신이 된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한 스승의 그늘에 줄을 서면 반드시 그 무리가 되어야지 스승을 비판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조폭과 비슷하다. 꼬붕이 오야붕을 따르듯 끝까지 예스맨이 되어야지 소위 충성스러운 반대의견(Loyal Opposition)은 용납되지 않는다. 중국 최고의 리더쉽을 실천했다는 당태종은 신하 위징을 가장 신임했는데 그 이유는 위징이 “아니 되옵니다”라고 항상 가장 세게 자기에게 브레이크를 건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변신(變身)을 인정하지 않고 흑백논리에 익숙해 배신으로 간주하는 폐단을 빨리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차제에 인류역사상 유명한 배신 몇 가지를 손꼽아 보자.
1. 배신의 대명사 가롯 유다
Judas Iscariot은 신을 팔아 넘김으로써 서양문화권에서는 배신자의 대명사이며 최악의 인간으로 분류되어 아직까지도 욕을 들어먹고 있고 단테의 신곡에서는 지옥 최하층에 있는 루시퍼의 입에 물려 놓았다. 다른 사도들이 다 성인으로 분류되어 축일을 가지는 데 비해 유다는 성인은 커녕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를 막론하고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독일에서는 아이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한다.
그런데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기독교 신자,역사학자,호사가들이 미치도록 알고 싶어하는, 왜 겨우 염소 두 마리 값 밖에 안 되는 은화 30 전에 유다가 배신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혹자는 예수를 판 유다는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가난뱅이 농부이며 이 유다 가롯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는데, 이름이 같다고 유다 가리옷에게 전부 뒤집어 씌웠다는 말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세리 출신으로 예수님 밑에서 회계 담당이었으며 전대를 관리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배신”에는 늘 돈과 권력이 배후에서 춤추고 있다.
유다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자료도 있었을 텐데 AD 312년 니케아 공회에서 아나타시우스파가 삼위일체설을 공인하고 그 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을 받은 유세비우스가 공인받지 않은 경전을 모두 없애라 지시했기 때문에 많은 문서들이 사라졌고 그 뒤 쿰란동굴 등지에서 추가 경전이 발견되었지만 이에 관한 기록은 없는데 다만 2006년 “유다복음’이라는 게 등장하여 예수가 유다에게 자신을 팔아넘겨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구, 예수가 메시아로서 완성되는 것을 도운 인물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정통 기독교에서는 이를 위경(Pseudepigrapha)으로 간주한다. 이 메시아 완성설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제시되고 있는 것인데,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유다의 행동도 신의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유다의 배신은 그 자체로 예수의 대속을 완성하기 위한 신의 계획이었다."는 식의 해석으로 오래된 철학적 문제기도 하다.


2. 사랑의 배신자
2.1. “클레오파트라”
BC 48년, 테살리아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패하고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쫓아간 율리우스 시저(당시 51세)는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당시 21세) 만나 연인관계에 빠진다. 그 6년후 시저가 암살당하자 이집트로 돌아온 그녀는 28세때 다시 안토니우스(당시 41세)와 사랑에 빠진다.
그 뒤 로마의 최고권력을 두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쌍방은 악티움 해전에 이르게 된다. 쌍방의 군세는 옥타비아누스와 부관 아그리파가 거느린 병력이 중보병 8만, 기병 1만2천, 중함선 40 척이었고,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측은 중보병 6만5천, 경보병 2만, 기병 1만2천, 초대형함선 60 척이었다. 쌍방 막상막하의 무력이었지만 바람을 등진 옥타비아누스가 유리한 위치였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되자 그토록 처절한 전투를 처음 보는 클레오파트라는 선장에게 돛을 올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모든 이집트 배들이 그 뒤를 따랐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전력의 손실을 감수하며 힘들게 싸울 필요 없이 최고 권력자만 유혹해 제 편으로 만들면 그게 손쉬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미 당대의 최고의 남자 두 사람을 자기 치마폭에 놀게 한 경력에 자신이 있었다. 이집트로 돌아온 그녀는 거기서 한 술 더 떠 알렉산드리아 망대에 숨겨놓은 조상 프톨레마이오스의 보물을 덧붙여 옥타비아누스에게 협상안을 보냈다(나중에 이 보물은 로마로 옮겨졌는데 금값이 폭락해 당시 년 12%이던 로마사채 시장의 금리가 4%로 떨어질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한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가 착각한 게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당시 33세)는 “년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취향이 아니란 사실을… 그녀의 나이 이미 39세, 중년의 나이. 옥타비아누스는 년하의 여인을 좋아하는 스타일. 그래서 5살 연하인 리비아를 얻었는데 그 당시 그녀는 유부녀(티베리우스라는 3살백이 남자와 뱃속 7개월짜리 딸을 가진)였는데 옥타비아누스가 그녀의 남편 클라우디우스에게 동방속주총독 자리를 주는 조건으로 양도받은 터였다(전 남편 클라우디우스도 손해본 건 아니었다. 후일 자기 자식 티베리우스가 다음 황제가 되었으니……).
자기의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결국 그녀는 자살을 택했다. 로마의 역사가 Dio Cassius는 “그녀는 당대에 가장 위대했던 로마인 두 명을 사로잡았으나 3번째 사람에게 파멸하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아래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욕하는 장면.(셰익스피어의 극본)
** “다 끝났어! 이 더러운 이집트년이 나를 배신했어. 함대는 적에게 항복했어. 그리고는 모자를 던져 올리고 마치 오래 못 만난 친구처럼 붙어 희희덕거리고 있어. 세 번이나 사내를 바꿔 서방질한 창녀 년! 내가 전쟁에 몰두한 사이에 이년이 전쟁 초보자에게 나를 팔아 넘겼어, 모두 달아나게 놔 둬! 내가 내 매력에 복수를 당할 동안 난 할 일을 다했어. 도망가게 놔둬! 끝났어!”**
( 아래는 로마에 입성하는 클레오파트라)

2.2 이수일과 심순애
조중환의 번안소설 長恨夢의 주인공들이다. 여기서도 배신의 근본요인은 다이아몬드 즉 돈이다.
원작은 일본작가 오자키 고요가 지은 金色夜叉. 원작에서는 교복을 입은 남학생(간이치)의 다리를 붙잡고 여자(오미야)가 메달린다. 남자는 게다를 신은 발로 여자를 힘껏 차며 모멸찬 눈초리로 내뱉는다. “놓아라 도미야마의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었느냐?”
장한몽에서 이수일은 게다 대신 구둣발로 심순애를 찬다. 대사는 다음과 같다.
“ 2장 대동강변 부벽루
(상수에 부벽루의 일부가 암벽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하수는 높지 않은 둔덕을 이루 고 있으며 그 둔덕위가 사잇길로 되여있다. 둔덕에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부벽루 만큼이나 나이든 고목들이 적당히 서 있다.
무대앞…… 전면은 모래사장으로 되여 있다. 이따금 이 모래사장에 밀려오고 스치는 잔잔한 물결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겠다. 밤 하늘에는 어스름한 보름달이 매달려 있고, 스산한 밤 꾀꼬리 소리와 더불어 FI 되면 ,하수 사잇길로 두 그림자가 나타난다. )
<中 略>

(이와 때를 같이하여 김중배가 사잇길에서 나타난다 그는 금테안경에 홀쭉바지,
상의안엔 조끼를 걸쳤으며 그조끼 양쪽 주머니 사이엔 황금 시곗줄이 눈부
시다. 하이칼라에 나비 넥타이 차림이다.)
<中 略>
(이때 난데없이, '순애!' 를 피맺힌 절규로 외치며, 쏜쌀같이 뛰어내려오는
한 사나이. 그는 경성제대 예과학생인 이수일이다.)
[순애] 귀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향한다. 수일임을 알아챈 그녀의 눈이 빛난다)
[순애] 수일씨! (자석에 이끌리는 쇠부치모냥 두 남녀의 몸이 이끌린다. 이것은 실로
일순간의 일 이였다. 두 남녀는 포옹한다. 힘껏!)
[김중배](불의의 침입자에 일순 넋을 잃었던 그는 눈앞의 사나이가 제 라이벌임 을 확인하자 애써 젊잖게) 아니 이거이 뭔 일이당가 잉!
[수일] 그러는 당신은 무슨 원한이 있기에 나의 사람을 앗아 가려 하는가!
[김중배] 뭐여 ? 나의 사랑 이라고라……
(순애모를 쳐다본다. 마치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묻듯이---)
[순애모] (당황하며) 요요요 ... 요거이 뭔 일이당가 잉! (일갈한다.)
[수일] ………
[순애] (수일을 방어하듯 앞으로 나서며) 어머니
[모] 니가 나가 콱 죽는거를 보고 자파서 그려냐 잉!
수일아 순애는 김중배와 결혼 할랑께 그리알고 썩 가보더라고 잉!
[수일] 어머니! 하오나 우리는 백년 가약을 굳게 다짐했던 사이였음을 밝히지
않을수가 없읍니다. (사뭇 영탄조이다.)
[모] 이게 무슨 개뼉따구같은 소리여?
(순애를 보고) 고거이 사실이냐……
[순애] 아뢰옵기 송구스런 마음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어머니!
[모] 아따 환장 허겄구만 이잉! 뭐여 이 잡것을 콱! 어이구 나 죽겄네 ... .....
(하고 침몰하는 배와 같이 주저 앉는다)
[순애] 어머니……… (부벽루쪽으로 가있던 중배가 서서히 닥아오며)
[김중배] 슬퍼하지 마쇼 이잉! 나가 있응께. 장모님께서는 걱정 콱 붙들어
메드랐고요 이잉!
[모] ……? (구세주를 만난듯 중배를 쳐다본다.)
[중배] 나가 몸은 비록 작다 할지라도 마음만은 대해와 같이 넓은께... ....
[모] 아니 고거이 참 말임감?
[김중배] 참 말이요 참말이랑께 ... ..
[수일] 가소롭구나! 김중배……
[김중배] 이봐 학상! 학상이면 학상답게 공부나 열심히 할 거이지 이거이 뭔 짓이여?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나가 경고 하는디 좋은 말로 할 때 여그서
떠나부러 .....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하드라고 이잉! .... ....
[수일] 경고라니 당치않구나! 김중배 듣거라!
경고는 오히려 내가 해야할 것이다.!그대는 무슨 원한이 있기에 싹트고 봉우리 지려는 꽃밭에 그 더러운 황금의 힘으로 짓밟으려는가? 그게 장안의 명문이요 재산가 김중배가 취할 길이란 말이냐?
[김중배] 과연 수재들만이 다니는 예과생 이라 말발이 보통이 아니구만 이잉!.
나가 자네와 같이 말장난 할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응께 ! 1절만 허드라고...... 허지만 자네가 원한다이면 나 김중배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수도
있당께. 첫째, 나는 자네에게 경성대학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의학비. 일절을
부담허고, 자네가 원한다면 해외유학도, 보내줄 용의가 있어부러. 어떤가 수일...
단, 부질없는 연정이나 미련은 이 강물에 흘려 버린다믄 말이여.
올라갈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다 이거여 알겄나 수일군.......
(웃으면서 사라진다 순애모 김중배를 따라 나간다)
[수일] 가소롭구나. 김중배의 입에서 그런말을 하다니!
[수일] 이 황금 벌러지! 치사한 배금주의자! 남의 사랑을 빼앗는 비겁자! 악마!
악마에게 저주를 저주를! 저주가 내리소서!
(길게 단장의 절규를 토하며 주저 앉는다.)
[순애] 수일씨…
[수일] 내 염려는 조금도 말고 순애씨나 가 보시요. 마음대로…
[순애] 아직도 분이 가시질 않으셨군요.
[수일] 분? 분한들 어찌 하겠오? 가난뱅이 학생 주제에.…
이런 주제에 지난 날을 깨끗이 씻어버리지 못하다니…
[순애]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수일] 괴롭단 말인가? 괴롭겠지. 사람이라면…….
지난 겨울 이었지. 그날 밤 우리는 백년 가약을 굳게 맹세했었어.
그런데 그 사랑은 이제 산산히 부서지고 있어. 모래성처럼 그 더러운 김중배의 구두발에 우리의 사랑은 짓밟히고 있어.
[순애] 그만하세요! (괴로운듯 한 쪽으로 피한다.)
[수일] 약한건 여자라더니 순애는 어리석었어!
[순애] 그건 너무 하신 말씀이에요.
[수일] 그럼 기로에 선 순애 에게 묻겠오. 순애는 누굴 택할 것인가?
김중배인가 아니면 이수일인가? 양자 택일의 결정적 순간이요. 순애!
[순애] 흐흐흑……(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괴로워한다.)
[수일] 왜, 사랑을 따르자니 수일에겐 황금이 없고 돈을 따르자니 김중배 에겐 애정이
없더란 말인가!
[순애] 수일씨!
[수일] 이 더러운 손을 놓아라! 이수일은 심순애의 사랑의 배신으로 인하여 오늘밤
여기서 죽어갔다. 사랑을 빼앗긴 나에겐 학문도 공부도필요 없다. 대학 졸업장이 내게 무엇에 필요하며 법학사는 무슨 소용이며 변호사가 된들 무엇에 쓰자는 건가!
장안 갑부 김중배 선생 어부인!그 거룩하신 안면을 처들고 마지막으로 이수일의 마지막 얼굴을 처다 보라! 그리고 가슴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
[순애] 수일씨! 어데로 가시려나요?
[수일] 놓아라 나는 갈 길이 바쁘다.
[순애] 제발 수일씨!(하며 만또자락에 매달린다.)
[수일] 더럽다 이손! 놓아라 나는간다.(뿌리치고 퇴장)
[순애] 수일씨!……(수일 뒤를 따라 나간다)
----
원작에서 남편에 의해 강제로 몸을 버린 오마야와 간이치의 관계는 비극으로 치닫다가 중단된다(작가 오자키 고요가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하던 중 1903년 위암으로 사망)
장한몽에서는 결혼 중에도 4년간 순결을 지킨 심순애가 4년 후 이수일과 재결합.
호세대 가와무라 미나토 교수에 의하면 원작 金色夜叉도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 소설 “여자여 약한 것”을 각색한 것이라 한다. 다이야몬드를 주는 설정, 남자 주인공의 대사 내용이 흡사하다는 것.


사랑의 배신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짝짓기 본능과 생식본능이 합해진 것으로 당한 측은 미련없이 빨리 잊어버리는 게 상지 상책!

3. 정치적 배신
3.1. “브루투스 너도냐?” 시저 암살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의 군단장이었던 같은 이름의 아버지와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원로원의 강직한 정치가인 카토 (소)와 이종남매 지간이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였다.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서 브루투스는 아테네, 페르가몬, 로도스 섬 등지에 유학했다.
. 브루투스는 키프로스에서 고리대금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소아시아의 총독으로 있던 키케로는 그의 고리대금업을 강하게 비난했다. 로마로 돌아와서는 정계에 진출해 "원로원파"(보수적인 공화주의파벌)에 가담했다. 그는 제1차 삼두정치에 반대했는데 특히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폼페이우스를 미워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아버지의 원수이지만 지금은 원로원파를 이끌고 있는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했다. 카이사르는 정부인 세르빌리아의 부탁을 받고 특별히 전쟁터에서 브루투스를 죽이지 말 것을 부하들에게 명령했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이 대패하자 포로가 된 그를 용서하고 즉시 석방하였다. 기원전 46년 삼촌 카토가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와 격전을 벌일 때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호의로 갈리아 키살피나총독으로 파견되었고 무난히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갑자기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망인이 된 카토의 딸, 포르키아 카토니스와 결혼하였다. 카이사르의 밑에서 그는 계속 출세하여 기원전 44년 법무관에 임명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고 점차 왕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반대파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카이사르의 암살을 모의했고 브루투스를 그들의 중심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3월 15일 브루투스는 반란자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했다.
시저는 붓을 들고 방어하다가 일행 중에 끼인 브루투스를 보고,
“브루투스 너도냐?”
라며 얼굴을 망토로 감사는데 이 대사는 셰익스피어가 쓴 것이다.
암살 직후 브루투스는 "폭군은 죽었다!(Sic semper tyrannis)", "자유가 회복되었다!" “나는 시저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다”라고 외쳤지만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토니우스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그의 암살동기는 불명하지만 그의 과거 행적-고리대금업, 정략결혼-등을 보건대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사랑해 독재자를 죽이기 보다는 암살 후 중심인물로 추대하겠다는 동료들의 유혹에 넘어간 걸로 추측된다. 즉 권력욕이 배신을 저지르게 한 것이다.


3.2 배신이 가른 운명의 전투-세키가하라
서기 1600년(慶長 5년) 음력 9월 15일에 일본 미노국 세키가하라(지금의 기후 현 후와군 세키가하라마치)에서 벌어진 전투는.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간 내전으로. 이 전투에서 승자에게는 향후 260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한이, 패자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력규모도 양군 총합 17만 명을 웃도는데다가 향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큰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고작 몇시간에 불과했다.
명분론으로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혈통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및 그의 생모인 요도도노를 지지하는 소위 오오미 파가 중심이 된 서군에게 있었고 동군은 배신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양의 사상은 군주가 天命을 거슬렸을 때는 배신을 해서라도 뒤집어 엎는 소위 혁명이 정당성을 갖는다. 이는 맹자의 중심사상이기도 하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 무익한 조선전쟁을 일으켜 패망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고 주변 다이묘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반면에 서군은 중심인물인 이시다 미츠나리 자체가 이에야스에 비해 중량감이 부족했고 따라서 결집력이 약했다. 아래의
부대 배치도만 보면 서군이 월등 유리하다.(파란 색 ;서군, 붉은 색 ;동군, 노란색; 서군이지만 배신)



메이지 천황 시절 일본의 사관학교 장교로 온 프로이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이 포진도만을 보고 즉시 서군의 승리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일본인들이 동군의 승리와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소령은 "그것은 작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사실 포진만 놓고 보면 전후사정을 몰랐던 클레멘스가 서군의 승리를 장담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일단 군력은 양군이 거의 대등한 상황에서 지형은 서군이 월등하게 유리했던 것. 동군은 말 그대로 포위당한 상태인데 그것도 그냥 포위도 아니고 산골짜기에 갇혀 포위당한 상태였다. 승패를 가른 그것은 바로 배신이었다. 서군 중 히데아키가 이끄는 1만 5천의 병력, 서군 전력의 약 20% 가량이 미리 이에야스로부터 나중에 군현 몇 개를 떼어 받기로 하고 동군과 내응을 약조한 것이었다. 배신자들은 언제나 지독한 기회주의자들이다. 어디로 붙는 게 득이 될지 확실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정오가 될 때까지 어느 쪽이 유리하다 할 수 없는 백중세가 지속되었다. 병사들이 지쳐서 슬슬 힘을 빼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응키로한 히데아키가 이때까지 결정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하자 보고를 듣고 화가 난 이에야스는 히데야키의 진지에 대하여 위협사격을 몇 방 갈겼다. 이에 화들짝 놀란 히데야키는 마음을 다잡고, 산 밑의 서군 일부인 오오타니 군의 배후를 급습했다. 이것이 전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서군 중에 이탈자가 점점 많아지고 결집이 강한 동군은 서군을 차례차례 괴멸시키고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승리한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수립하였고, 조선과의 화친을 외교의 기본으로 삼아 내외의 호응을 얻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워낙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라서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세키가하라'라고 하면 일종의 '중대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 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이며 창작물에서도 가끔 "여기가 우리의 세키가하라야!"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4. 아들의 배신
권력에 눈이 어두워 아들이 아비를 배신한 예는 고금에 허다하지만 그 중 대표격으로 수양제가 꼽힌다. 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중국에 다시 단일 왕조를 확립한 隋 文帝, 그에게는 장남 양용이 있었으나 楊廣(뒤의 煬皇帝)의 위장 금욕생활에 속은 부인 독고황후의 권에 못 이겨 그를 태자에 책봉했다.
태자에 오른 양광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독고황후가 죽자마자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아니 그 전에도 방탕했지만 그것을 감추지 않아도 되었다.
양광은 가만 있어도 제가 차지할 황제 자리에 더욱 안달을 내어 아버지의 황위를 노렸고 평소 사모했던 부황의 후궁인 선화부인 진씨를 범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견은 당시 병이 위중했지만 자신의 후궁을 범하려 한 아들을 문책하려 했으나 그것을 안 양광은 상서우복야 월국공 양소, 시종무관장 장형과 장군 우문술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대신들과 궁녀들을 죽이고 그날 밤에 장안 인수궁 대보전에서 양견을 살해했으며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 우문지급을 보내 살해했다.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범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패륜행위를 행한 양광은 곧 제위에 오르니, 그가 수의 제2대 황제인 양제이다. 그뒤 무리한 토목공사,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그는 민심을 잃었다.
그리하여 결국 재위 14년째인 617년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이 반란은 120여건이나 되었고, 그 규모도 엄청났다. 이 반란군 중에는, 양광의 이종사촌형인 태원 유수 이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연은 장안으로 들어가, 양광을 태상황으로 만들고, 황태손 양유를 황제로 잇게 하여 황실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다. 급박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양광은 강도(양주)에서 사치와 방종, 여자들을 탐하다가, 자신의 근신이었으며, 고구려의 원정군 사령관인 우문술의 아들, 근위장 우문화급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가까이는 김일성 역시 아들에게 배신 당했다 볼 수 있다.
탈북작가 김진성 씨에 따르면 1994년 6, 7월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상당히 통 큰 양보를 할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다. 또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방문 후 답례로 서울에 가서 읽을 연설 원고까지 이미 써놓았었다고 한다. “서울 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일성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북조선은 주먹이 강하고 대신 남조선은 잘산다. 이 둘을 합치면 우리 민족은 무서울 것이 없다. 나진-선봉, 청진 황금의 삼각주를 왜 남들에게 주겠는가? 남한에 개방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그 자필연설 원고는 유품과 함께 고려연방제통일업적 선전용으로 한때 금수 산 기념궁전에 공개 전시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당시 이미 그는 아들 김정일 당 조직비서에게 실권의 대부분을 이양한 상태였다. 그 얼마 전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가 평양을 방문했는데 김일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카터 대통령과의 사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정상회담을 수락한다는 돌출발언을 하게 되었다.. 김정일은 당황했으나 이미 세상에 알려졌고, 또 북핵 해결 연장선에서 남북화해 카드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정치적 타산으로 처음엔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점점 기정사실로 발전해 가고 있는 남북정상회담과 통일 분위기는 김정일의 권력을 위협했으며 이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정일은 김일성이 묘향산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는 그 시점에 당 중앙 비서회의를 주관하여 통일보다 사회주의가 더 우선임을 역설하였다. 김정일이 묘향산 특각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김일성을 방해한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철도 상에게 김영삼 대통령이 육로로 오게 하려면 개성부터 평양까지 지금의 단선철도가 아니라 복선철도를 놓아야 하는데 6개월이면 가능하냐고 물었다. 철도상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격노한 김일성이 그 이유를 따져 묻자 노동자들에게 쌀을 주면 가능하다는 철도상의 말에서 배급이 중단된 사실을 처음 안 김일성은 즉시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북한 강연 자료들에선 김일성이 그날 업무 과 부담으로 유달리 담배를 많이 찾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그 상황이 있은 직후부터였던 것.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온 김일성이 탁자를 치며 몹시 흥분해있자 김복신 부총리가 김일성을 위로하기 위해 4월에 주지 못했던 학생들 교복을 7월이면 공급을 다 끝낼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날 오전회의는 끝내 더 하지 못하고 오후 회의를 위해 회의장을 나왔던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첫 심장 발작을 일으킨다. 김정일의 지시로 내각 상들이 모두 평양으로 호송되고, 회의장은 텅 비어있었다. 첫 번째 헬기는 도중에 추락되고 두 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땐 이미 김일성의 심장은 멎어 있었다. 김일성 사망 후 북핵문제와 남북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급격히 돌아가자 세계 언론은 김정일에 의한 김일성 암살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회고록을 집필했던 작가와 그 측근 들은 김일성이 김우중 회장과의 단독면담 자리에서 “지금 평양에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고 있다. 당신이 망명지역을 알아봐 달라”고 조용히 그리고 애절하게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김정일은 아비의 유훈인 “인민들에게 최소한 이팝에 고깃국을 먹고 해주라는 유훈을 못 지키고, 300 만의 아사자를 내었으니 아비를 배신하였다 보지 않을 수 없다.
유엔이 권장하는 성인의 1일 열량은 2100칼로리인데, 미국 농무부에서 조사를 한 결과 북한 주민의 90%가 유엔에서 권장하는 영양분 섭취 기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아시아에서 유엔의 권장섭취량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가 아프가니스탄, 예멘, 북한, 이렇게 3개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북한이 가장 심각하단다.
( 수양제,)

(김일성)

5. 나라의 배신자 을사 5적
을사오적(乙巳五賊)은 1905년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사람을 말한다. 당시 대신 중 수상격인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조약에 반대했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은 조약 체결과 직접 관계가 없었다
매국노의 대명사 을사5적들은 한일합방 후 일제에 열심히 협력했고 후작, 백작,자작 등 작위도 받았고 현금도 두둑이 받았다.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짓을 했을까? 을사늑약 후 이지용이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나는 오늘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이 되고자 한다. 국가의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매천야록>과 정교의 <대한계년사>에 나와 있다. 친일파도 나름대로 자기 변명거리는 있었던 것.
<매천야록>에서는 그 중 이근택의 얘기가 나온다.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는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한 취객이 그의 수레를 당기며 흘겨보고 말하기를 "네가 왜놈이라 하는 이근택인가. 오적의 괴수로 그 영화와 부귀가 이에서 그치는가." 하니 이근택이 크게 노해서는 그를 결박 지워서 경찰서로 보냈다. 그 취객은 모진 고문으로 기절하였다가 밤이 깊어 깨어나서 말하기를 "네놈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 또한 명백히 욕질을 하였으니 죽어도 통쾌하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자." 하고 드디어 의복을 찢어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다. 한규설의 딸이 시집올 때 계집종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교전비라는 것이다. 이때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와 땀을 흘리며 숨찬 소리로 아내에게 억지로 맺은 조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부엌칼을 들고 나와 꾸짖었다. "이근택아.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 돌아가겠다." 그러고는 뛰어서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계집종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진주 기생(妓生) 산홍(山紅)의 일화도 있다. 진주는 의기(義妓) 논개(論介)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진주 교방에 속했던 기녀 산홍 또한 논개의 절의를 계승한다는 자존심이 충만하고, 뛰어난 외모와 예능도 고루 갖췄던 것으로 전해 온다. 1906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인 이지용(李址鎔)이 진주에 왔다.산홍을 보는 순간 이지용은 마음을 빼앗겼고 많은 돈을 내놓으며 자신의 첩이 돼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산홍은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비천한 기녀지만 사람일진대 어떻게 매국노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단번에 거절했다.무안을 당한 이지용은 크게 화를 내며 산홍에게 몽둥이질을 했다고 전해진다.


6. 최악의 배신자는 ;”인민의 배신자”
6.1.무쏠리니:
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는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당하였고 192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국무총리였다. 1925년부터 최고통치자를 뜻하는 두체(Duce)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스스로 제국 제일 원수 계급을 제정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이 칭호를 사용하여 이탈리아 군의 통수권을 행사하였다. 무솔리니는 국가주의, 협동조합주의, 생디칼리즘, 팽창주의, 사회진화론, 반공주의와 같은 다양한 정치 이념들을 조합하여 이탈리아 파시즘을 만들었다. 1924년부터 1939년까지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같은 공공사업과 대중교통을 위한 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성과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제국 전반의 경제적 안정을 실현하였다. 또한 라테란 조약을 통해 로마 문제라 불리던 로마와 바티칸 시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와 같은 업적으로 무솔리니는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무솔리니는 한 때 지역사회주의정당에 가입, 활동했으나 "사회주의 이론은 죽었다. 남은 것은 원한뿐이다."라고 주장하며 파시스트당을 창건하였다.(1921년)
1922년 10월 27일에서부터 29일까지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은 로마 진군을 감행하였다. 검은 셔츠단을 앞세운 이 쿠데타로 인해 총리 루이기 파크타는 실각하였다. 10월 28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권력획득을 인정하였다. 무솔리니는 군부, 자본가, 그리고 우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되었다.
총리가 된 첫해 무솔리니는 우익 연정 내각을 구성하였다. 하지만 그는 곧 권력독점사업에 착수하여 1928년에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다. 경제분야에서 그는 대규모 공공 토목 사업과 전시 경제 체계를 기반으로 한 국가주도 공업화를 통해 완전고용 수준으로 실업률을 낮추었다. 무솔리니는 또한 녹색혁명에 상응하는 이른바 "곡물 전투"를 독려하여 5천여 개소의 농장을 건립하고 폰티네 습지를 개간하여 다섯 곳의 "새마을"을 지었다.
히틀러와의 관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관계는 30년대 초만 하더라도 히틀러의 일방적인 구애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원래 무솔리니를 열렬히 추종했고 무솔리니의 정치 기법을 배우고 본받았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총리 자리를 차지했을 무렵, 나치스, 즉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그저 세계 각국에 있는 미미한 파시즘 정당의 하나에 불과했고 히틀러도 그저 그런 존재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얻고자 이탈리아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하기까지 했고, 로마 진군을 흉내내서 벌인 맥주홀 쿠데타가 실패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여하튼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에도 그를 시골뜨기 촌장 정도로 간주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의해 오스트리아 수상 돌푸스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히틀러가 이것을 기회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고 하자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는 초강경한 경고 전언을 날렸고 히틀러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인종차별주의도 인정하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종이라니? 독일 인종이란 게 따로 있나? 있기나 했었나? 있을 수 있나? 실제이든지, 신화 속이든지 아니면 이론가의 말장난이든지? 아, 그래. 우리는 대답해 줘야겠지. 독일 인종이란 것은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황당하구만. 다시 말하지만 그런 건 없어. 우리는 그런 거 없다고 하는데, 과학자도 있다고 하고 히틀러도 있다고 하는 구만.”
그러나4년 후인 1938년부터 둘은 급속히 가까워졌고 이때부터 인종차별정책도 따라가게 된다.
이때부터 무솔리니의 내리막길은 시작된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즉각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는 즉각적으로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이듬해 전황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무솔리니는 독일의 승전으로 전쟁이 조속히 종결되리라 판단하였고 1940년 6월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무솔리니는 소련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진군시켰다. 이후 일본제국이 진주만 사건을 일으키자 이탈리아는 미국에도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후 전황은 이탈리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942년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국민들의 무솔리니에 대한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를 부채질한 건 이탈리아 국민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독일군의 태도 때문에 더 심해졌다. 마침내 국왕 빅토르 이마뉴엘 3세는 무솔리니의 체포를 명하고 그는 체포되어 산악지대인 캄포 임페라토레에 격리 구금되었다. 1943년 9월 12일 나치 독일 무장 친위대의 대위인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공수부대와 친위대로 편성된 72명의 구조대가 그를 구출하여 히틀러와 회동시켰고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로 돌아가 파시스트 국가를 재건하기를 바란다며 고무시키자 그는 1943년 9월 23일 살로에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망명 정부의 수반이 된다. 그러나 이 망명 정부는 나치 독일의 이탈리아 전선 유지를 위한 명분에 불과한 괴뢰 정권이었으며 실제적인 정부로서 기능하지는 못했다. 1945년 4월,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는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그는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4월 27일 공산주의 계열의 파르티잔인 제52 가리발디 여단 정치부 소속 우르바노 라차노는 코모 호 인근의 마을 동고에서 무솔리니와 페타치를 체포하였다. 이튿날 파르티잔은 무솔리니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그와 페타치를 총살하였다. 이 둘의 시신은 새벽 3시에 밀라노에 도착하여 피아잘레 로레토Piazzale Loreto 광장으로 실려와 군중에게 전시되는 과정에서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근처에 있던 에소Esso-Exxon-주유소의 지붕에 매달렸다.
무솔리니의 시신은 밀라노에서 대중들에게 전시되고 모욕을 당한 뒤에 도시의 북쪽에 위치한 무소코 공동묘지Cimitero di Musocco에 표식이 없이 묻혔다. 1946년 부활절에 무솔리니의 시신은 파묻힌 장소를 알아낸 이탈리아의 네오-파시스트인 도메니코 레씨시Domenico Leccisi와 다른 두 명에 의해 발굴되었다.
몇 달 동안 그곳에 묻혀있다가 8월에 마침내 무솔리니의 시신은 다시 파내 밀라노 교외에 위치한 세르토사 디 파비아Certosa di Pavia 수도원으로 옮겨졌다가 1950년대 후반에서야 프레다삐오에 있는 무솔리니 가족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무솔리니의 비참한 최후는 인민에 대한 배신의 대가이기도 하고 조강지처를 버린 배신의 대가이기도 하다.


6.2. 니콜라이 2세(러시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1894년 11월 2일, 알렉산드라와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하였으며, 바로그 해 선제인 알렉산드르 3세가 신장병으로 서거하자 제위를 계승했다.
불행의 씨앗은 그가 가정적으로는 헌신적인 남편이자 매우 관대한 아버지였음에도 인민의 소리와 삶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데 있었다. 그리하여 개혁의 소리에 대해서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변화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결과는 아내가 열렬히 신봉한 요승 라스푸틴의 손에 나라가 좌우지 되고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쳐 전제 정치의 폐해만 더욱 심각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에 굶주림에 지친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황제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황궁으로 갔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 행렬 선두에는 가폰 신부, 뒤에는 노동자가 결집하였고, 이들이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게 된 것이다. 파업은 이미 1주일 전에 발생하여 계속되다가 이날 22일에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국민들을 쏘지 말아라”고 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마지막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이때까지 니콜라이 2세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정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는데 3000가구 이상의 귀족 저택이 파괴되고 1월 ~ 10월까지 봉기가 2700회나 일어났다.
지금까지 러시아 민중 속에 신앙과 같이 뿌리 깊던 황제 숭배는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황제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러시아 혁명의 실마리가 되었다.
1917년 3월 8일, 마침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9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이 파업 데모에 참가하여 “빵을 달라”고 외쳤다. 이틀 후에는 시위가 시내 전체로 확산되었다(2월 혁명).
이에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라의 총신이자 내무장관에게 '체제안정에 유지해라'는 사실상 무력진압을 명령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수만 명의 군 병력과 예비군을 배치시켜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3월 12일 아침 6시 유명한 볼린스키 연대의 한 하사가 자신의 지휘관을 쏘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세모노프스키, 이스마일로프스키, 리토프스키, 마지막에는 표트르 대제가 직접 창설한 역사가 오래된 프로오브라젠스키 수비대까지 혁명에 가담했다. 이로써 군대는 물론이요, 예전에 혁명가들을 칼로 살해했다던 악명 높은 기병대조차도 시위대에 동정심과 자책감을 느껴 결국 혁명군에 가담했고 그리하여 혁명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황제직 포기를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어린 나이인데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아무도 인정하려 하지 않아 자신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제위를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케렌스키가 수반이된 임시정부는 미하일에게도 하야를 권고, 마침내 304년 동안 지속되어 온 '홀슈타인-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후1917년 10월 케렌스키 내각은 퇴임하고 레닌 주도의 볼셰비키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자 니콜라이의 처리를 놓고 사형을 하자는 볼셰비키 강경파와 수감으로 끝내자는 멘셰비키 및 케렌스키 일파의 의견이 대립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였던 1918년, 러시아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국민들은 기근으로 죽어갔고, 볼셰비키에 반감을 드러낸 자들은 그들로부터 숙청 당하여 백군으로 돌아선 자도 있었다. 그리고 서방 연합국들과 일본, 미국 등은 반 볼셰비키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백군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당시 우랄 지방에 격리되어 한적한 생활 중이던 니콜라이 2세의 가족에게는 종말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8년 7월 어느 날 그들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감금되었고 바로 그날 가족 모두 총살형을 당하였다.


7. 배신자까지 포용한 사나이-징기스칸
한 때 우리나라 기업들 간에 “징기스칸의 리더쉽을 배우자” “속도전” “일사불란한 글로벌 리더쉽” 등을 외친 적이 있으나 내용인 즉 사실은 공허하다. 징기스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하여 배우려 해도 배울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하는 경장을 한 기마병의 민첩한 행군,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귀신같이 사라지는 전술 등등은 사실 그 전에도 흉노, 유연, 돌궐, 고구려, 선비, 거란 등 북방 기마민족의 전형적 군사 기동 방법이었으며 징기스칸이 고안해 낸 것도 아니다.
징기스칸에 관해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록은 元史 정도인데 거기에도 징기스칸이 사람을 부리는데 귀신과 같았다는 정도이다. 용인술의 달인, 그리고 그가 실천으로 보여준 비범한 포용력이 그가 종전의 2~3배가 아닌 수십배, 수백배로 팽창하는 세계제국을 건설한 원동력이었다.
징기스칸이 아직 칸에 오르기 전 그의 아내 보르테는 한 때 메르키트족에게 납치 당했고, 징기스칸의 첫째 아들 출적(朮赤)은 징기스칸의 피가 섞인 아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보르테를 정부인으로 계속 인정하고 출적에게도 장남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자기들이 못나 조선의 여성을 청나라에 공물로 바치고 그들이 도망해오면 정조의 박탈 여부에 관계없이 “환향녀”라고 기피하고 천시하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징기스칸은 나중에 후계문제를 정할 때 차남 찰합태(察合台)가 이 피의 문제를 거론하자 아예 차남을 건너 뛰어 3남 와할태(窩闊台, 太宗 ) 에게 대칸의 지위를 물려 주어버렸다.
또 피정복민족에 대해서는 반항자는 철저히 초토화 시킨 반면 협조자들에 대해서는 자치권을 인정하고 출신에 관게없이 능력위주로 인재를 선발하고,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해서도 관용과 존중 정책을 취했다. 이런 비범한 포옹력이 세계제국 건설에 초석이 된 것이다.


8. 배신자의 최후
배신자의 최후는 대부분 비참하다. 특히 인민에 대한 배신은 처벌이 가혹하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민은 변덕이 죽 끓듯 하여 등에 앉아 있을 때는 나는 듯 달리지만 등에서 떨어지는 순간 물려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수양제에 대한 이연의 배신, 도꾸가와 이에야스 처럼 주군에 대한 배신이 대의명분에 합당한 경우, 그 배신은 면책되고 도로 만인으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와 일응 비슷하지만 큰 신의를 위해 작은 신의를 희생하는 것은 배신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또 인간 간의 신의는 신과 인간과의 신의를 능가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초기에 당 엘리트들이 특권을 부인하고 인민과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을 때는 효율이 좋았다. (1905년 노일전쟁에 패할 정도로 허약하던 러시아가 불과 35년만에 일본보다 몇배의 힘을 가진 나치독일과 맞장 떠 이길 정도로 국력이 신장한 걸 보라). 그러나 당의 권력 독점은 필연적으로 당의 관료화, 정체화를 초래하였고 이는 봉건 신분질서보다 더 경직된 계급제도를 형성하여 결국 내부붕괴로 무너지게 되었다. 인민에 대한 배신은 결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도 이미 집권층이 인민을 배신한 시기가 오래 되었다. 미구에 그에 대한 응징이 내려질 것이다.



[나도 한마디]
오중관  나도 봉영선생의 의견에 전적 동감이다 지욱이의 문장력 지식폭은 단연 우리동기중의 군계일학 우리동기들도 모두 한문장하잖아 한문장 못하면 동기생 아니지 봉영과 지욱이를 그리워하면서 2015-08-08 오후 5:22:00 x

이지욱  나는 시 하고는 좀 거리가 멀어서... 2015-07-26 오전 10:02:00 x

이지욱  자네야 말로 뛰어난 영상 솜씨로 에세닌의 시를 재번역(영어판 많음),영상과 함께 올리면 걸작이 되리라 믿네! 2015-07-26 오전 9:55:00 x

이지욱  2015-07-26 오전 9:49:00 x

이지욱  2015-07-26 오전 9:49:00 x

이지욱  문송아, 갑자기 어지럽게 와카노? 혹 더위 먹었나 싶어 여기 시원한 시 두수 선사한다. 세르게이 에세닌, 17세 연상의 여인, 이사도라 던칸을 사랑하다 권총자살로 마감한 친구! 그의 시는 시인 오장환이 번역했는데 20세기 가장 뛰어난 번역작이란 평을 받았으나 "월북시인"이란 이유로 사라져 버렸다. 2015-07-26 오전 9:45:00 x

봉영  히야~ 놀랠 놋짜다. 어데서 이런 해박한 지식을.. 지욱이 자네는 사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들어앉아 책을 써야 할 것 같다. 돈은 뜬구름이요 잘 지은 책은 영원히 남는 장사.. 내가 자네만큼 필력이 있다면 진즉에 그랬을 텐데.. 지욱아! 내 말 명심해라. 이제 우리에게 때가 얼마 없으니...당장 귀거래사.. 알겠재? 2015-07-26 오전 3:09:00 x

이름 내용 비밀번호 [등록]

제목 등록일자 등록자 조회수
   배신과 변신 2015-07-22 이지욱 18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