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가치로 승화시키는 것이 偉人의 품격! 1. 하피첩(霞帔帖) 며칠 전 정약용 선생의 하피첩이 국립민속박물관에 7억5,000만원에 낙찰 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피첩은 정씨 가문에 소장되어 왔는데, 6ㆍ25 전쟁 중에 수원역에서 분실됐다가 2004년 파지 수집 할머니의 수레에서 4첩 중 3첩이 발견돼 세상에 다시 나왔다 한다. 노을 霞자에 치마 帔자라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한자이지만 그 뒤엔 슬픈 사연이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조 때에는 촉망 받는 문신으로 단순한 유학자를 넘어 기중기를 만들어 수원화성신축에 기여한 기계공학자, 철학자, 암행어사 등 공적이 화려한 분이었지만 순조가 즉위하자마자 형 정약종이 천주교 순교자의 길을 택하자 그도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처음엔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유형의 길에 올랐다. 선생이 부인으로부터 혼례 때 입던 낡고 해진 붉은 치마 다섯 폭을 받은 것은 유배 10년 째(당시 48세)… 경기 양수리 자택에 남아 병색이 깊어진 부인 홍씨는 아마 이젠 살아서 다시 보긴 힘들 거라 예감하고 영원한 이별의 징표로 31년 전 시집 올 때 입었던 옷을 선생께 보냈던 것…… 그러니 그걸 받아 든 다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는 슬픔에 머물지만은 않았다. 슬픔을 극복하고……. 실학자답게 그 치마를 책 크기로 오리고, 부족한 부분은 종이를 끼워 넣은 후, 두 아들에게 교훈을 남기는 글을 적어 넣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걸작-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대부분 책들이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쓰여졌다. 나도 이런 비슷한 슬픔을 겪기는 했다. 러시아 생활 7년째, 독신으로 유배 비슷한 생활을 해오던 2004년 어느 날, 딸이 편지를 보내왔다.( 당시는 e-mail이 없던 시절이라 종이 편지로). 전에도 두어 달 만에 편지를 받곤 했는데 그날 편지는 좀 길었다. 그 중에 이런 문구가 확 눈에 들어왔다. “…….. 아버지 이제 어머니도 머리가 하얗게 새셨어요……”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뭐라구? 마누라 머리가 새하얗게? 그래선 안 되는데… .. 젊어서는 늘 가불회수로 반쪽 난 월급봉투만 갖다 주고, 그 뒤엔 사업한다 수시로 속 썩히고, 러시아로 올 땐 불과 이틀 전에 “이제 한국선 희망이 없다. 러시아로 간다, 3년 후엔 돌아오겠다’는 말만 훌쩍 남기고 왔는데….. 언젠가 한번은 호강을 시켜줘야 하는데….. 벌써 흰 백발이? 그래선 안돼! 그래선 안돼! 나는 얼른 거울로 뛰어가 내 얼굴을 봤다. 그제서야 내 머리칼도 어느덧 반이 허옇게 되어 있었다. 그전엔 거울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모습이…..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 가족을 등진 나는 뭣을 위해 사는가…….?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 다산처럼 슬픔을 “가치”로 승화시키지는 못 했다. 위인과 범인의 차이……
2. 사마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 다른 중신들은 한무제가 이릉이 죽일 놈이라 성토하는데 이의가 없었으나, 까칠한 사마천은 달랐다. 더욱이나 대대로 역사집필 가문의 전통인 사마천이 아닌가? 한무제에 대들었다. “그건 이릉이 잘못한 게 아니고 그 위의 이광리가 전략을 잘 못 짠 것입니다. 이릉은 죄가 없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총사령관 이광리가 흉노를 우습게 보고 대판 붙었다가 전멸할 지경이 되자, 이릉은 결사대 5천을 조직, 중국군을 그래도 3분의 1쯤 구하고 자기는 화살에 맞아 의식을 잃었는데 흉노 왕이 적이지만 가상하다 하여 그를 구하여 흉노에 머무르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무능하다 공격한 이광리는 누구인가 한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이씨부인의 오래비가 아닌가? 당연히 “침실 속 공작”에 의해 이릉의 가족은 몰살 당하고 그를 비호한 사마천까지 “사형” ! 이걸 면하려면 속전 50만냥을 내거나 궁형 중 하나를 택해야…. 사실 그 전 중국에는 갖가지 흉악한 형벌이 많았다. 능지 , 거열(수레로 찢어 죽이기) 요참 (허리를 자르기). 박피 (살갗 벗기기) 포락 (사람을 통째로 굽기), 팽자 (가마솥에 넣고 삶기), 부복 (배를 가르기) 추장 (내장 꺼내기) 할비 (코 자르기) 절설 (혀 자르기) 알안 (눈 빼기) 월족 (다리 자르기) 유폐(여성 생식기 막기),수교(짐승에게 물려죽이기), 인식(죽여서 인육 나누어 먹기) 등등 한 고조 유방의 마누라 여씨만 하더라도 유방이 죽자 유방이 사랑하던 애첩을 우선 약을 먹이어 맑은 목소리를 못 내게 한 다음, 머리카락, 손목, 발목을 자른 뒤 돼지우리에 넣어 돼지와 같이 지내게 했다. 이런 잔학한 형벌 중 많은 것을 없앤 것도 사실 한무제였는데 중벌 중 하나인 성기를 절단하는 궁형을 남겨놓은 건 한번은 유용하게 써먹겠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사마천이 딱 걸려든 것이다. (가난한 사마천이 50 만냥을 구할 수는 없을 테니…….)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3년 후 당시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묘소를 참배할 수 있을지, 하루에도 아홉 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가만히 집에 앉아 있으면 멍하니 무엇인가를 잊은 듯 어처구니가 없고 자꾸만 부끄러워져 언제나 등골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신다네” 그렇지만 사마천은 자신의 의지를 덧붙인다.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 즉‘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치욕을 참아가며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을 택한 것이다.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려 청사에 빛날 사서를 쓰겠다는 결심이 사마천의 태산과 같은 선택이었다. 요즘이야 볼펜이나 컴퓨터 자판으로 책을 쓰면 되지만, 당시는 52만 6,500자의 책을 대나무를 얇게 오린 죽간이나 나무를 얇게 오린 목간에 일일이 붓으로 쓰고난 뒤 끈으로 연결하면 책(冊)이 되고, 이 책을 둘둘말면 권(券)이 되는 것이다. 5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한다. 다음은 그의 명언 중 몇 마디…… 단호하게 감행하면 귀신도 피한다 / 이름은 헛되이 나지 않고 선비는 까닭없이 어울리지 않는다 /참으로 곧게 난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 / 혁대를 훔치면 사형에 처하지만 나라를 훔치면 왕이 된다 / 인간은 상대의 재산이 열배가 되면 헐뜯고 백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배가 되면 사환이 되고 만배가 되면 노예가 된다
3. 명량대첩, 노량해전 전의 이순신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어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한양으로 압송돼 옥고를 치른 이순신이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풀려난 것이 1597년 4월 1일이다. 하루를 더 머물고 4월 3일 길을 떠난 이순신은 이틀 후인 4월 5일에 고향인 아산 염치에 도착한다. 옥에서 풀려는 났지만 무계급, 애써 키워놓은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배는 다 박살 나 열두척만 남았다 하고……. 황폐해진 그의 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8일이 지난 13일, 아들이 옥에서 풀려났다고 여수에서 마중 오던 어머니 변씨가 오다가 배에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한다. 이순신은 자신의 비통한 심사를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4월 16일(양력 5월 31일) <병자>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애통해 하던 이순신은 3일 후 조정의 재촉으로 남행길에 든다. 부친의 임종도 곁에서 지키지 못하고 삼년상을 치른 바 있는 이순신은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마저 잃은 채 종군 길에 나선다. 그리고 아는 것처럼 같은 해 8월 3일 선조의 교지를 받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9월 16일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명량대첩 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을 무렵 가장 사랑하던 아들 면의 죽음이 전해진다.. 즉 참척(慘慽)의 불행을 당한 것이다. (마을로 쳐들어 온 왜군과 싸우다 전사).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너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 년 같구나. 이 날 밤 열 시쯤에 비가 왔다.
이순신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차자인 회,열은 같이 왜란에 참전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면(葂) 밑의 훈(薰)은 이괄의 난 때 전사하였고 신(藎)은 1627년 후금과의 전쟁 중 전사하였다.
4. 칼 맑스 성경을 제외하고는 역사상 가장 많이 출판되었다는 Karl Heinrich Marx의 “자본론”. 이 책은 그가 런던에서 빈곤에 쪼들리며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죽는 가운데 쓰여졌다. 그나마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건 아내 에니 정도….. 부모, 형제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자본론’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자본이나 만들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단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4년 맑스를 만난 이후 거의 40년간 맑스를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면서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흔히 우정의 징표로 “관포지교”를 말하는데 맑스와 엥겔스 사이야말로 관포지교를 무색케 할 만큼 의기가 투합한다는 이유로 한평생을 조건없이 지원한 사례는 전무후무 하다. 엥겔스는 심지어 맑스가 하녀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사생아(프레드릭)를 낳자 맑스를 보호하기 위해 “맑스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다.”라 주장하였다.
5.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회재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으로.,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당시 학자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가 기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기 논쟁에서의 이의 우위를 주장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그러나 주자의 입장을 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며. 주자의 견해나 사서육경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독창적으로 해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자의 한 마디의 말과 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던 조선 중기, 후기 성리학자들의 학문태도에 비해서 매우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였다. 그의 학문적 능력은 중종의 귀에도 들어가 중종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된 이후 조정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당시는 대지주였던 훈구세력과 중소지주 출신의 독서인이었던 士林이 대항하던 시기였는데, 그는 사림의 입장에서 중세적 이념체계인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하여 봉건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완성을 꾀하는 한편, 훈구세력을 배척하기 위한 주자학적 명분론을 철학적으로 강화하였다. 그럼에도 조광조의 혁신정치 세력이 등장하자 급진적 개혁이 실패할 가능성을 여러 차례 충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파를 축출하려 하자 이때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의 직책으로 추관(推官)이 되어 사림파 및 윤임 일파를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재판 당시 사림파들에 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려 사림을 구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윤원형과 이기 등이 이를 문제 삼아 그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후에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 당시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었고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윤원형은 회재의 관직박탈에 만족하지 않고, 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자 회재를 무고하게 연루시켜 당시로선 가장 험지였던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귀양 보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문하생들을 길러 냈고, 많은 저서를 저술했으며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이황은 그를 東方四賢으로 추모하였고 그를 도통의 정통으로 평가하였으며 생애 후반과 만년에는 자신의 저서와 학문 연구 외에도 이언적의 저서와 저술들을 정리,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
[나도 한마디]
이지욱
과찬 황감, 양재역벽서사건 일화 한 토막, 이언적 제거가 일차 목표였던 이 사건 주모로 지목된 정언각, 그는 사람을 음해 골로보내는 명수여서 당대에 "독침"염라국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몇 해뒤 그가 낙마하자 말이 그를 밟아 즉사, 이에 사람들이 그 말을 義馬라 불렀다.(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