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 산맥은 동서 2500 km,남북 750km에 뻗친 거대한 산맥이다. 서천산 중에 최고봉은 레닌봉(7134m)이고 중부천산에는 칸 탱그리(7010m;15m의 빙하포함고도), 승리봉(7439m)이 자리하고 있다. 1943년 정밀 측정 전에는 칸 탱그리가 제일 높은 산으로 여겨졌다. 한국 재야 사학자들 중에는 한단=환단=한탱그리이며 단군이 이곳에서 강림 했으며 “한밝산”이라 불렀다 하는데, 재야사학자들의 주장 중에는 황당무계한 것도 많지 마는 이 설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왜냐하면 天孫을 주장하는 민족들은 역시 하늘에서 내려올 때 제일 높은 산으로 내려온다 믿을 수 밖에 없고, 우리 민족이 한반도 자체에서 발생했다면 한반도에서 제일 높은 백두산으로 내려 왔겠지만,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이동했다는 소위 기마민족 동래설에 의하면 알타이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내려왔다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 키르기즈의 고대국가인 烏孫만 하더라도 까마귀의 손자임을 자칭했으니 고구려의 三足烏와 무슨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진다. 또 알타이 신화에도 구약성서 처럼 노아의 방주와 99% 일치하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노아가 아니고 “나마”라는 사람이다. 나마는 나이가 많으므로 세 아들 소존눌, 살눌, 바릭스를 시켜서 큰 배를 만들었고. 홍수가 시작된 지 이레가 되니, 물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왔고 배가 떠 있었다. 또 여러 날 지난 후에 다시 내다보니, 이제는 모든 산꼭대기마저 다 물에 잠기고 하늘과 바다뿐이었다. 배는 오랫동안 물 천지 위를 떠다니다 마침내 홍수가 그치고 여덟 개의 산꼭대기가 바다 위의 섬처럼 생긴 곳에 걸렸다…” 현지인들은 이 여덟 개의 산꼭대기가 천산산맥이라 믿고 있다. 키르기즈스탄의 수도인 비슈켁 남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천산산맥은 西천산에 해당한다. 해마다 5월 1일이면 우리나라 시산제 비슷하게 이 산중 한 봉우리에 오르는데 이곳 사람들은 5월 초 첫 천둥이 치면 땅속에서 잠자던 개구리와 뱀이 놀라 깨어나 땅 위로 올라온다 믿는다. 실제로 5월 초 이전에는 비가 와도 천둥,번개는 치지 않는데 여기에는 과학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하이킹 그룹 중 한 명이 내게 자꾸 시산제 목적지인 4206m Komsomolets 봉에 오르자 했지만 나는 망설였다. 출발지 캠프인 Ala Archa 입구가 표고 2000m 이니 하루에 표고 2200m를 도보로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는데, 이는 혜산시(표고 700m)에서 백두산 병사봉을 올랐다 내려오는 것보다 더 높은데 과연 하루에 가능할까? 또 가끔씩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무릎이 13시간 연속 산행을 버텨낼까? 자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내가 이 나라를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떠나고 나면 기회가 언제 다시 오겠나? 또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내년 이후에 신체조건이 어떻게 바뀔지…. 그리 되면 68세 이후에 4000m 이상의 봉우리를 오를 수 있을까 생각하니 미련이 생겨 결국 승락했다. 토요일(4월 30일), 13시, 모이는 장소에 가니 미리 모여있던 거의가 20대인 일행들이 수군거린다. “할배가 나타났다!” “나무 지팡이다!” “걸어 다니는 GPS다!” 이곳 트레킹팀들은 주로 큰 산 골짜기에 흐르는 계류 양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건너편으로 혹은 가던 길로 되돌아 온다. 아주 큰 肉山이라 한국처럼 사통팔달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고 등산 용 지도도 없다. 가이드 들도 대원들이 길 잃을 염려도 거의 없으니 행동수칙을 까다롭게 하지 않고 오후 몇 시 버스 떠날 때 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출발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오솔길을 다니던 습성이 되어 그들처럼 계곡길을 안 다니고 아예 산 중턱에 올라 거기에 희미하게 난 산양이나 말들이 내놓은 길을 걷는 걸 좋아한다. 나는 산 밑에서 움직이는 일행들을 늘 빤히 보며 걷지만 그들은 나를 볼 수 없다. 내가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점심 때 쯤이면 어디쯤 도착하고, 어디서 Turn 하겠구나 짐작하고 때 맞추어 나타나면 그들은 그게 신기한지 “걸어다니는 GPS”란 별명을 붙인 것이다.
오후 1시 20분에 출발하여 한 시간 후 국립공원 캠프장에 도착하였다. 우리 돈으로 3400 원 주고 빌린 텐트, 메트리스, 슬리핑백을 내려놓고 텐트를 치려 하는데, 내가 한국서 4반세기 전에 사용하던 A Tent와 조립 방식이 달라, 꾸물거리고 있으려니 옆에서 텐트 작업하던 젊은이가 얼른 뛰어와 거들어 준다. 이곳 젊은이들의 경노사상은 우리나라 50~60 년대와 같아, 버스에서 아무리 스마트폰을 하고 있더라도 나이든 사람이 타면 벌떡벌떡 일어나지 우리처럼 수구리 족이 없다. 텐트를 치고 나니 총괄 가이드가 모이라 한다. “기상은 내일 오전 4시, 출발은 5시, 걷는 속도에 따라 3개조로 편성한다. 오늘은 3시간 동안 자유시간인데 ‘산악인들의 묘지’에 다녀올 사람들은 다녀와도 좋다” 라 한다. 조 편성을 확인하고 나니 아르투르라는 친구가 같이 묘지에 가자 한다. 이 친구는 45세인데 산에 다닌 지 5년 되었단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이 친구는 맹렬파인데 산행도 혼자서 나는 듯이 사라져 버린다. 가이드도 아예 제쳐놔 버리고 간섭을 안 한다. 40대 이상은 나밖에 없으니 주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여기서는 60세 이상이면 안방 차지하고 아예 야외활동을 않는다)
같이 산 중턱에 있다는 묘지로 향했다. 오전 중에 오던 비는 그쳤으나 사방에 안개가 자욱하여 몇 미터 앞이 안 보인다. 한 4~50분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묘지가 나타났다. 30 여기의 묘인데 러시아 식으로 평토에 돌을 얹고 돌에 사진을 새겼다. 그 중에는 에베레스트 정상, K-2 등정을 하고서도 이곳에서 사고로 묻힌 젊은이도 있었다. 년도를 보니 대개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고인이 되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 무덤들을 보니 갑자기 헤르만 헤세의 시가 떠오른다.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이상하다. 덩쿨과 돌은 모두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활기에 찰 때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에 휩싸이니 그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 …………….. ……….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혼자다.
묘지에서 돌아 내려오는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면서 맞은편에 거대한 산이 시야 전체를 막는다. 흡사 쥬라기 공원에 떨어진 것 처럼….. 有와 無는 종이 한장 차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는 걸까…….
동시에 좌측에는 아름다운 계곡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산악인의 공동묘 터를 자리 잡을 때 경치 좋은 곳을 택해 영혼이라도 위로 하려 했던 모양이다. 캠프 사이트로 돌아오니 젊은이들이 중앙에 큰 돔 텐트를 쳐놓고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경하고 있으려니 아르투르가 옷소매를 잡아 끈다. “젊은이들 모여 있는데 왜 눈치 없이 옆에 있냐? 꼬냑 한 병 가져 왔으니 한잔하자”며 제 텐트로 나를 이끈다. 들어서니 키르기즈 현지 꼬냑 500g 짜리를 내 놓는다. 여기 꼬냑은 우리 돈 6500 원 정도로 싸다. 그런데 양주 애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프랑스 제 나폴레옹 꼬냑과 맛 차이를 모르겠다. 탁구공 크기보다 약간 큰 훈제 고기 토막 하나도 안주로 꺼내 놓는다. 레몬 하나도 꺼내 잘게 썰어 내밀었다. 한잔 홀짝 비우고 레몬 한 조각을 쪽 빨고, 땅콩 껍질만한 고기 한 점을 먹으니 감칠 맛이 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엉성한 배낭을 가지고 다니냐?” 묻는다. 사실은 작은 배낭은 한국서 가져왔지만 큰 배낭은 없어서 시장에 가서 중국제 하나를 우리 돈 3000 원 주고 샀는데, 싸구려임을 눈치 챈 모양이다. “신발도 불실해요.” 그래 맞다. 한국서 가져온 등산화가 옆이 다 헤어져 시장에서 7000원 주고 중국제 농구화를 사 신었으니……. 사실대로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6월에는 꼭 4박 5일로 자기 가자는 데로 가자고 꼬드긴다. 거기는 깊은 골짝인데, 호수가 3개 있고, 빙하가 코 앞이며, 전인미답이다. 거기에는 한국의 산삼보다 더 좋은 황금뿌리 식물이 사는데 자기는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한다…… 반쯤 승락 하고 술을 다 비우고 잡담하다 내 텐트로 돌아왔다.
텐트에서 자는 게 얼마만인가? 25년은 넘은 것 같다. 2인용 텐트라고 빌렸는데 혼자 누우니 꼭 맞다. 옆 텐트에서는 청춘 남녀들이 노래도 부르고 재잘댄다. 청춘의 특권인데 누가 뭐랄 수 있나? 새벽 2시인데도 계속 재잘댄다. 선잠이 들었는데 3시 57분에 맞춰 놓은 스마트폰의 알람이 울린다. 얼른 일어나 삶은 달걀 2개와 쵸코파이 2개로 아침식사를 떼우고 집합장소로 갔다. 그믐달이 산 꼭대기에서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다. 5시 10분 우리 조가 먼저 출발했다. 폭포가 나오는 2시간 가량의 길은 여러 번 다녀 봐서 잘 알기에 성큼성큼 걸음을 뗀다. 조금 지나니 주위가 훤해 온다. 눈앞에 큰 神木 하나가 눈에 띄었고 거기에 천조각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샤마니즘은 알타이어족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공통 분모이다. 그 독한 이슬람도 이곳에서는 끝내 샤마니즘의 벽을 이기지 못하고 반토막 이슬람으로 변질되었다. 술도 마시고, 히잡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말고, 돼지고기도 팔고…… 인구의 25%인 동방정교와도 아무런 문제없이 공존한다. 물론 정통교리에 충실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하루 5번 기도 시간만 되면 장소 상관없이 담요 깔고 기도를 드린다. 뒤의 조가 와서 우리 조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속보로 뛰는 듯이 나아가는 청년들도 있다. “내게도 저런 힘 자랑 하던 시절이 있었지…….” 별안간 대학 3년 때 설악산 공룡능선을 오르던 시절이 생각났다. 즉흥 합성 시조도 한 수 떠오른다.
“천산의 청춘들아 수이 감을 자랑마라! 봄비에 솟은 초목 가을 비에 시드나니, 오십 년 세월은 풀잎 위의 이슬이라네.” 두어 시간 걸으니 멀리 폭포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스마트폰에 있는 고도계는 2600m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 조 조장이자 총괄 가이드인 마라트가 아무래도 엉기는 것 같다. 속도가 너무 느리다. 그도 눈치를 채었는지 나보고 다른 조로 붙고 싶으면 그리하라고 한다. 그래서 아딜레트라는 청년이 이끄는 다른 조에 붙었다.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잰 걸음으로 쉬지 않고 꾸준히 오른다. 산 튤립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그걸 보자 이 조에 있던 첵코 처녀가 풀밭에 발랑 드러누우며 사진을 찍어 달랜다. 이 처녀는 여기서 알바를 하며 산행에 자주 나오는데 활달하고 힘이 넘쳐 청년들을 능가한다. 한번은 내가 일행은 오던 길로 돌아가고 혼자 강을 건너 맞은 편 절벽 위로 난 가파른 길로 하산하려 하자 나를 따라오겠다 했다. 험하다고 말렸으나 막무가내….. 그런데 막상 험한 낭떠러지 산양 길을 잘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혹은 몇푼 안 되는 보수의 영어강사 알바, 혹은 NGO로 활동하면서 산행을 즐기는 영국,독일,프랑스, 네델란드, 첵코,발트삼국, 노르웨이,미국,캐나다 등지의 젊은 남녀들이 꽤 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Agressive하다.
폭포가 빤히 보이는 곳에서 왼쪽 능선을 향해 급경사로 오르기 시작한다. 뒤쳐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애썼지만 어느새 일행들이 나를 다 앞지르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고도가 3300m 를 넘어서자 흐른바위와 흙길은 사라지고 눈밭이 시작되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멀리를 보니 그 유명한 “자유한국봉”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누가 왜 이 Ala-Archa 국립공원 중 가장 수려한 4777m 봉을 “자유한국봉”이라 이름 지었나 알아내려 그간 수차 노력했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여기에 “레닌봉” “블라디미르 푸틴봉” 등 사람이름을 갖다 붙인 건 드물지 않는데, 나라이름을 봉우리에 갖다 붙인 건 드물다.
고도가 3800m에 이르자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목적지인 Komsomolets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꼭 영화 “에베레스트”에 나오는 에베레스트 봉의 마지막 피치와 너무 닮았다. 칼 같은 양쪽 사면, 군데군데 막고 있는 바위들, 아득히 보이는 넓지 않는 정상……. 고산병 증세인지, 호흡이 가빠져 몇 백 미터를 못 가 주저앉아 쉬고, 걷다가 주저 앉고를 되풀이 한다. 앞 쪽에도 인기척이 없고 뒤에도 없다. 혼자 앉아 있자니 스르르 졸음이 온다. 저 쪽 아래에서 독수리 몇 마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문득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나? 愚問을 해 본다. “그 산이 거기에 있기에 너도 거기에 있다.” 말로리 식 답변은 賢答이고…. “당신 같은 지독한 驛馬殺은 처음 본다” 던 한국 점쟁이의 말….. 그래서 나는 흘러 흘러 드디어 말(馬)의 고향인 이곳에 온 게 숙명이었던 것인가? “여기 눈밭에서 자면 안 된다”고 스스로 일깨웠지만 눈가풀이 말을 듣지 않는다. 조용필의 “꿈”이란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 영원히……..! 눈이 스르르 감겼다. 깜빡 졸다가 깨니, 앞 쪽에서 몇 사람이 나타난다. 그 중에 어젯밤 술을 같이 마신 아르투르도 끼어 있다. 그들은 이미 정상에 갔다가 하산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얼마를 더 가야 하나?” 물으니 두 시간이라 한다. 그러면서 나보고 끝까지 갈 거냐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간을 확인하니 11시를 좀 넘었다. 이윽고 그들도 사라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바람이 맹렬히 불어 모자가 날아갈 듯 해 얼른 모자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불과 5분 내지 10분 눈감고 존 것이 체력에 영향을 미쳤는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붙는다. 호흡도 어렵지 않다. 그래서 20 분 정도를 안 쉬고 걸을 수 있었다. 마침내 정상이 빤히 보이는 능선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사방이 탁 틔었다. 사방을 둘러보고 그냥 할 말을 잊었다. 가까이에 높이가 10 여 미터는 넘음직한 반 갈라진 빙하 너머로 첩첩이 이어진 천산의 준봉들……..!
그것은 울툭불툭 땅에서 솟아 난 산들이 아니었다. 천(天)의 손(手)만이 만들 수 있는 예술 작품 이었다. 그래서 天山인가………? 자존망대의 교만함도 없고 오직 자기가 생긴 모습만을 연출하는 거봉들……! 대동강 부벽루에 오른 시인 김황원(金黃元)이 천하절경에 감동한 나머지 즉석에서 “長城一面 溶溶水 大野洞頭 點點山”이란 단 두 줄로 풍광을 단숨에 읊어 놓고는 해가 지도록 다음 연을 생각 하였으나 종래 잇지 못하고 부벽루 기둥을 붙들고 울다 돌아갔다는 얘기처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풍광의 경계를 이미 넘어 서 버렸으니 어찌 필설로 형용하려는 愚를 다시 범할 소냐….? 동서남북의 산들이 나를 압도 한다.
천천히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상은 비좁았다. 7,8 명이 서 있을 정도의 공간. 한국처럼 해발 4206미터라 표시한 표시석도 없다. 산 이름, 그리고 작년에 누가 2차대전 전승 70 주년을 기념해 이곳을 등반했는지, “승리 70 주년”이란 표시판만 적혀있다. 정상임을 표시하는 러시아식 삼발이 쇠 구조물 하나 밖에……
시간을 보니 1시 15분…… 8시간 5분을 걸어 도착한 셈이다.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새로운 조장 아딜레트가 원래 반환점 하산 예정시각이 1 시였다며 나보고 정상에서 10 분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며 주의를 주고 내려갔다. 출발은 50 명 가까이 한 것 같은데 정상까지 온 사람은 그 3분의 1도 안 된 것 같다. 용감한 체코 처녀도 요번만은 중도 포기한 것 같다. 우리 원래 조장 마라트도 포기했단다. 며칠 전 우연히 한국식품점에서 산 번데기 통조림과 소시지 1 개로 점심을 떼우고 돌아섰다. 하산 길은 더 멀리 느껴졌다.
칼 같은 능선을 통과하자니 좌우로 헛 디디면 대번에 1500m 쯤은 논스톱으로 자유낙하 할 것 같았다.
눈밭이 끝나는 지점쯤 되자 겨우 안심이 된다. 다리는 칼로리 소모가 절정에 달해 목발로 대체된 것 같은 느낌…. 베이스 캠프로 도착하니 정각 오후 6시였다. 꼬박 13시간을 걸은 셈이다.
버스에서 졸다 비슈켁 시내에 내리니 눈이 잘 안 떠진다. 눈을 뜨면 송곳으로 찌르는듯한 통증과 함께 눈물이 연속 솟구쳐 뜰 수 가 없다. 고글을 안 끼고 눈밭을 헤매다 설맹(雪盲)이 온 것인가? 아니면 피로가 중첩해 원기가 안구에서 다 빠져나간 때문인가? 아무튼 방법이 없으니 집에 도착하자 마자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한국 면세점에서 사 가져온 홍삼차를 뜯어 열 봉지를 한꺼번에 컵에 털어 넣고 물에 개어서 후루룩 마셨다. 이틀 후에야 겨우 퉁퉁 부었던 눈두덩이 가라 앉았다. “선 크림을 발라라”는 가이드의 충고도 무시한 결과 얼굴이 자외선에 타서 여러 군데가 허물처럼 벗겨졌다. 그냥 “영광의 상처”로 여기기로 했다.
이곳은 아직 산에 가는 게 레져로 자리를 잡지 않았다. 산에 간다면 의례 버섯이나 열매를 따러 가는 줄 안다. 그만큼 등산 활동을 하기 미비하며 휴게소는 전무하고 한국처럼 산 중턱에서 막걸리를 파는 곳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다. 불편도 하지만 아직 때묻지 않은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람들이 드물어, 한적한 곳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천국이다.
[나도 한마디]
이지욱
내 글에 관심이 있다니... 최근에 고려말을 시대배경으로 쓴 가칭 "야심 대 양심"을 탈고하여 출판사들과 교섭 중인데(여기서 메일로 접선하려니 쉽지 않네), 메일 가르쳐 주면 보낼테니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어보시기를...!
그러고 보니 지욱이의 탈출 권유도 일리가 있구만. 특히 요사이 한국의 대기오염수준은 상당히 나쁘다네. 뻐떡하면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또는 매우 나쁨으로 예보되니 때로는 밖에 나가기가 겁날 때도 있네. 이렇게 대기질로 본다면 지욱이가 있는 곳이 훨씬 나을 수도 있겠는데 문제는 거긴 그리운 친구들이 없잖아.
한뫼회원 한 명이 확보된 것 같아 무척 반갑구만. 지욱아, 이제 그 수고스런 외국생활 청산하고 한국 오면 안되나? 영구 귀국에 여러 고려할 사항들이야 많겠지만 언제든 친구들과 만나 한 잔 할 수 있고 매달 가벼운 트레킹 위주의 한뫼회 산행에도 쉽게 동참할 수 있는 한국 생활이 노후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지욱아, 시산제 잘 다녀오긴 했다만 좀 무리를 한 것 같구나. 4000m가 넘는 봉우리를 하루 13시간이나 산행하다니, 그것도 중국제 농구화에다 스틱도 부실하고, 아침점심식사도 부실하고 선크림도 안 바르고. 아무리 걷는 게 건강에 좋다지만 지금 나이에 우짤라고 이카노? 지욱아, 속히 귀국해 한뫼회의 일원이 되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