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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종과 박정희 리더쉽 공통점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16-11-02 오후 10:03:00
e-mail   lee.jee.uk.wgs@gmail.com
내용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 100주에 즈음하여 그의 리더쉽을 정리해 보았다.
지금 최순실 사태로 시국이 어수선하다.
이 사태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리더쉽의 위기” 이다.
리더쉽을 거론할 때마다 돋보이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세종대왕(이하 ‘세종’이라칭함)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통’이라 칭함)이다. 성공한 리더쉽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안티 박정희 지식인들은 “박정희를 추켜세우다 못해 이젠 만고성군(萬古聖君)인 세종대왕 수준으로 격상하려 하느냐”고 아연실색, 닭살을 돋구어 난리를 치겠지만 팩트(fact)는 팩트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Leadership이란 무리를 이끄는 한 행동양식이므로 조폭도 리더쉽 연구대상이 될 수 있고 산적두목도 대상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은 한 나라의 권력 최고 정점에서 한 시대를 이끌어 왔기에 권력쟁취의 합법성 여부와 떠나서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
이하에서 두 위인의 공통점을 보기로 한다.

1) 경청, 토론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가 취미였고, 책에 열중해 안질까지 생겼다. 공부한 연수나 지식 수준이 당대 대학자들보다 몇 수 위였고, 경연에서도 경연관들이 가장 자신 있다 뽐내는 경서 분야에서도 세종이 질문하면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하고 쩔쩔매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종은 국정을 논할 때 신하들에게 의논과 수렴 그리고 결단 과정을 꼭 거쳤다. 최고통치자가 독단적이면 주변엔 문고리 권력이 기승을 부리며 이들은 왕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차단하거나, 특정 의견만 접하게 하여 공정성을 상실한다. 세종은 윤대법을 만들어 백관이 교대로 왕과 정사를 논하게 하고 자신보다 부족한 신하들의 견해를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다. 신하가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나무라지 않고 그가 이해할 때까지 밤 세워 끝장 토론을 즐겼다.
MB처럼 “거기에 대해선 내가 좀 아는데….” 하면서 중간에 가로막고 나서지 않았다. 박통 역시 다 듣고 나서 코멘트를 하고, 문제가 많으면 재검토를 지시하지 중간에 자기가 나서서 먼저 칼질 하는 법이 없었다. 군 출신 답지 않게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는 것을 끝까지 들은 후에 판단하였다. 자기가 훨씬 잘 알고 있는 부분에서도 주무장관들과 참모들이 토론을 마친 후에야 발언하였다. 이런 토론을 거침으로써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작용을 파악,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다.

2) 싱크탱크의 활용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배양해 이들의 전문지식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박통도 서강학파로 불리우는 경제전문가들의 지식을 완전히 소화해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경제공부를 하기 위해 김학열 부총리 집에 수시로 막걸리 병을 들고 찾아갔다.

3) 현장주의
세종은 스스로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민생의 고단함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고 수시로 백성들을 찾아 직접 묻고 들었다. 내금위 사금만을 데리고 논두렁에 나가 흉년에 갈라진 논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박통도 성능이 시원찮은 헬리콥터를 타고 수시로 현장을 점검하러 다녔다. 이 때문에 사고가 날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사령관 시절에는 사병들이 쓰는 비누를 직접 사용하여 머리를 감다가 머리털이 쑥쑥 빠지는 걸 보고 당장 납품회사를 조치하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사령관이 쓰는 비누와 사병이 쓰는 비누가 달랐던 것이다.

4) 솔선수범
세종은 술을 즐기지는 않았으나 건강상 반주를 자주 들었는데 흉년이 들 때는 이 마저 끊었다. 신하들이 “건강상”드는 것까지 중지하지 말 것을 건의 했으나 “나는 술을 들면서 다른 사람은 금주하라 하는 것이 옳겠는가?”하고 듣지 않았다. 식성이 좋아 수라를 하루 네 번 들고 고기반찬을 즐겼으나 흉년이 들면 반찬 가지 수를 확 줄이고 고기반찬을 금지시켰다. 대제학 변계량이 “가뭄의 탓을 군주에게 돌리고 자책하면서 찬을 줄이는 것은 가뭄대책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군주의 건강을 해쳐 역효과를 가져온다” 주장했으나 듣지 않았다.
박통도 석유파동이 나자 근무실 온도를 18도로 낮추고 자신은 군용 야전 점퍼를 입고 근무했다.

5) 권한위임, 公조직 존중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황희에게 힘을 실어 주고 인사권도 일임하였다. 박통도 내각과 장관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비서실이 장관 위에 군림하는 걸 용납하지 않고 장관의 인사권을 존중하였다.

6) 민생우선
세종은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했고 민생이 국정의 최우선임을 강조했다. 박통도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를 부르짖으며 경제발전의 기치를 빼어 들었다.

7) 대단한 독서가
세종대왕이 엄청난 책벌레였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박통 역시 대단한 독서가였다. 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에 관한 책을 스스로 구입해 보기도 하고 보좌관이나 장관들이 준 것들은 읽고 나서 빨갛게 밑줄을 그은 채 되돌려 주었다.

8) 장기 비젼
훌륭한 지도자는 단기적 성과,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먼 앞날을 내다 본다. 귀족정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 한글의 창제와 반포가 행해진 것은 세종의 특별한 장기적 안목이 아니었으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통은 우리 경제가 1차로 수출주도형 경공업정책, 2차로 인프라 확충, 3차로 중공업 진흥계획을 세워 성공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과감한 외자유치 전략을 택했다.

9) 근면, 검소
세종 3년에 창덕궁에 전염병이 들자 거처를 옮겼는데 세종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둔 재목으로 별실을 두칸 지어 여기에 자주 기거 했는데 이 별실은 친히 명하여 주초(柱礎)도 쓰지 않고 지붕은 띠(茅草)로 덮었다 한다.
박통도 시해 당한 후 최초 부검 의사가 얼굴이 흰 수건으로 덮인 상태에서 허리띠가 너무 헤어진 것을 차고 있어 도저히 대통령인 줄 짐작하지 못했다 한다.

10) 균형감각
세종은 가뭄이 계속되자 골수 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끔 기우제를 지냈는데, 신하들이 가뭄에 대한 현명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예조를 통해 기우제를 지내자 청하면 이를 호되게 꾸짖었다. 또 “법을 변경하는 것은 그 전 법에 열 가지 폐단이 있고, 새 법에 한 가지 폐단도 없는 경우에야 변경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법치국가를 지향하면서도 “법 만능주의”를 경계하고 실현가능성이 없는 법을 만드는 것을 삼가 하였다.
박통은 경제개발계획을 세우면서도 기업을 정면에 내세우는 시장경제원칙을 훼손하지 않았고 관은 보조역할자임을 강조하였다. 결코 국가가 전면에 나서 관치경제를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11) 국가의 잠재력을 동원
농업이 국가경제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시절, 세종은 우리 농민들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혁신적인 농업기술 향상을 도모하고 관개수로를 정비하여 결당 평균 6~11석이었던 농업생산량을 결당 30~60 석으로 끌어올렸다.
박통도 우리민족의 잠재력이 인력에 있음을 인지하고 국민소득(GDP기준) 82불(1961년)에서 1693불(1979년)로 끌어올렸고 2013년 기준 24,000 불에 이르는 기초를 닦았다. 원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계획경제는 1928년 공산주의 본산인 구 소련에서 시발된 것이었는데 박통은 그를 좌익세력으로 매도하는 측에서 이를 문제 삼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12) 인재 풀의 저변확대
세종은 “사람이 어질면 싸립문과 개구정이에 사는 사람도 공경(公卿)이 될 수 있다”(세종실록 14.8.2)는 모토를 내걸고 광범위한 인재를 등용했다. 장영실은 어머니가 기생으로 동래현 노비였지만 태종이 발탁했는데 세종은 아예 면천시켜 중국에 유학까지 보냈다. 또 사람을 장점 위주로 쓰고 단점을 캐지 않았다. 이에 기라성 같은 학자,관료,기술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박통도 군 출신이지만 민간인들을 대거 등용하고 인재들을 키우고 국외 유학파들을 권유, 귀국시켜 KIST를 만들어 과학, 기술인력을 육성하였다.

13) 폭넓은 지식과 관심
세종은 “학문에는 버릴 게 없다” 하여 성리학자들이 천시하던 소위 잡학(의학, 천문,번역, 산수, 음악 등)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자신도 이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한번은 세종이 대소신하들을 대동 박연이 연주하는 아악을 듣고 나서 몇 번 째 음계가 반음이 낮다고 주장했다. 박연이 자세히 살피니 그 음계의 거문고 줄이 약간 느슨하게 조여져 있었다.
박통도 군사학 외에 건축,토목,지리, 한글,한자,음악 등에 전문가에 필적할 지식을 쌓고 있었다. 1965년 가을 어느 날 박통은 당시 대한중석 사장이던 박태준을 청와대로 조용히 불렀다. “지금 우리 국민에게는 우리 민족이 뭐든 우수하다는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야. 국민사기진작을 위해서도 복싱 세계챔피언이 나와야 해.” 그 말을 들은 박태준은 곧 당시 동양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김기수를 찾아가 훈련 계획을 짰다. 그리고 마침내 1966.6.25 김기수는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세계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14)자기 절제
세종은 전제군주시대에 마음만 먹으면 자유자재로 방탕할 수 있었으나 늘 자신을 수양하고 글 읽는 외에는 취미가 없을 정도였으며 여색을 경계하였다. 박통도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다소 느슨해졌지만 철저히 자기관리를 중시했다. 장교시절에도 양말은 스스로 빨았다.

15) 원칙주의자
세종은 말에만 의존하지 않고 반드시 통계조사, 감찰 등의 공식자료를 활용했다. 시책은 의정부,육조의 공식채널을 통해 시행하고 신상필벌의 원칙을 지켰다. 즉흥발상은 있을 수 없었다.
박통도 소속 장관 위주로 정책을 집행하였으며 장관과 동석한 자리에서 실무 과장, 국장이 현안을 직접 브리핑하게 하였다.

16) 자주국방
세종은 “영토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치 아래 사군과 육진을 개척하였다.
박통도 “자주국방”을 내세워 무기의 현대화 국방의 과학화를 이루어 내었다.

17) 소외계층 옹호
세종 1년 사냥에서 환궁하는 어가를 맹인 114명이 막아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을 물리치려는 호위군사들을 만류하고 그들의 애로사항을 끝까지 듣고 나서 쌀 40석을 내리었다. 그 3년 뒤에도 같은 유사한 일이 벌어졌으나 세종은 관청에서 빌린 곡식을 불실 화폐인 저화(楮貨)로 갚게 해 달라는 그들의 청을 그대로 들어주었다.
1964년 1월, 박통은 유성에서 꿩 사냥을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준비해 온 쇠고기를 김성은 국방, 박종규 경호실장, 이원엽 소장 등이 함께 다리 밑으로 들어가 굽고 있는데 인근의 거지들이 경호원의 제지를 뚫고 다가왔다. 박통은 경호원들을 만류하며 “오라고 해! 같이 먹자”며 점심을 거지들과 나누어 먹었다. 누가 “우리보고 거지라고 하지 않겠습니까?”하자 박통은 “거지가 지프차 타고 다니는 것 봤어?” 하며 파안대소 하였다.

18) 말의 무게
세종은 의견을 경청 수렴하여 결론을 내리고 또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관계자들이 논의하여 아뢰라”고 하거나 “의논하여 시행하겠다”고 함으로써 자연히 말에 신뢰와 무게가 생기었다.
박통도 측근 전용 이발사의 얘기로는 약속한 30분만 늦어도 직접 전화해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19) 희생정신
세종이나 박통 모두 자기 한 몸을 오로지 민생과 조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희생정신 없이 그와 같은 노력과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 할 수 있겠다.

20) 추진력
세종은 즉위 초 농업경제시대의 세제의 근간인 “토지세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대소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러나 과거시험에 ‘공법의 개선책에 대해 논하라’고 출제하기도 하고 당시 조선 인구의 4분의 1가량인 17만여 명의 신민(臣民)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당초 안을 보완, 결국 25년만에 후대의 근간인 조세제도를 완성, 시행하였다.
박통도 끈질긴 반대에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점 등이 대표사례로 꼽히지만 추진력이 남달랐다.

21) 다른 점
세종과 박통의 다른 점은 세종의 출신이 왕의 아들이었다면 박통은 빈농의 아들 출신… 세종이 왕의 아들이었으면서도 특권을 거부하고 민생에 헌신한 점이 존경스럽다면, 박통이 빈농에서 최고권력의 자리에 오른 것 역시 쿠데타라는 약점이 있긴 하지만 평소 신망을 쌓아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점에서 존경할 만 하다 않을 수 없다.




[나도 한마디]
노타이  지욱거사의 광팬입니다. 좀 더 자주 글을 올려 주십시오.. 본인의 얘기도 좋을 것 같아요.. 2016-12-19 오후 4:18: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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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과 박정희 리더쉽 공통점 2016-11-02 이지욱 1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