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곽재우 장군을 대단히 존경한다. 세종대왕, 충무공 급으로..... 근데 5월 31일 느닷없이 곽재우 장군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글을 써서 조갑제 닷컴 회원토론방에 올렸다. 반응도 신통찮았다. 예컨대 최근 내가 쓴 글 "문 대통령은 적폐의 정의부터 명백히 하라!"는 금방 조회수가 1000 회를 넘어갔는데, 겨우 100 회. 그런데 오늘 5월 달력을 찢고 보니 6월의 1 자 밑에 "의병의 날"이라 되어 있었다. 아마 이런 날이 있는 줄 모른 건 나만이 아닐거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 날이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당시 력으로 양력으로 환산하여 6월 1일로 기념일을 만들었다 한다. 묘한 기분...... (이하는 조갑제 닷컴에 올린 글)
홍의장군 곽재우! 아마 대한민국 국민들 중,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급에서 그를 모른다면 정말 국민인지 의심해 볼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성인들 중에서도 많지 않다. 그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그의 처신이 요즘 뜨는 소위 폴리페서(Polyfessor)들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그는 완전히 망가진 조선의 육군이 거의 절멸되었을 때 분연히 고향에서 사재를 통털어 2000 명의 의병을 일으켜 이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의병의 효시가 되었다.(처음 이란 건 항상 중요하다) 음력 5월 26일(양력 7월 5일)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정암진 강과 늪에 몰살시켜 좌절시켰다. (이때 왜군 사망자는 2000 명을 넘었다). 이순신 장군의 사실상 첫 대규모 승리인 사천해전(양력 7월 8일)이 있기 3일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승전보는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조정에 보고되기는 커녕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이 사정을 알고는 특별 상소로 겨우 풀려났다. 요즘도 “관공서 공무원도 못한 일을 민간인이 해 냈다”면 질투하여 제대로 보고를 안 한다. 그는 임란 내내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난이 끝나자 홀연히 모든 직책을 버리고 고향인 현풍으로 낙향 해 솔잎으로 연명하며 지냈다. 조그만 공만 세우면 한 자리 얻기 위해 권력자의 문전에 줄을 서는 폴리페서의 처신과 천양지 차이이다.
임란 전 그는 조식의 학문적 적통자로서 쟁쟁한 선비였지만(조식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돗자리를 엮는 등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렇지만 주위에서 인색하다할 정도로 근검했다. 너무 자린고비 같다면 그는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란이 나자 바로 그 달에(음력 4월 22일)사재를 몽땅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무기를 만든다. 사실 그에게는 선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그는 34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과거를 보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고 합격방까지 붙었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스른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고 말았다. 속이 좁았으면 의병은 커녕 “오냐 망해봐라!”하고 저주하였을 것이다. 임진란이 소강상태였던 2년 동안 은거하였던 그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음력 8월 또다시 출사하여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초야에 묻혀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여러번 당시 기거한던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출사할 것을 간청하여 결국 그해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의 부총관 등을 지냈고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또 함경도관찰사에 임명하여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사형 건의가 있자, 1613년 6월 사직 상소와 함께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바로 낙향했다 후세 사람들이 “행동하는 지식인”이란 말을 남용하였는데, 곽재우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의 원조이자 사표라 할 만 하다.
그의 이런 뛰어난 처신 외에 그는 병법에서도 괄목할만한 식견으로 공을 이루어냈다. 첫째; 그는 게릴라 전의 명수였다. 서양에서 게릴라전이 전술로 자리잡게 된 단초는 19세기 초(1808년) 나폴레옹이 페르난도 3세를 폐하고 멍청한 그의 형을 국왕으로 임명하자 이에 반발한 에스파냐가 게릴라를 조직해 나폴레옹군에게 대항한 것이다. 곽재우는 200 년 이상 앞서 게릴라부대를 조직하여 숫적으로 월등한(당시 10 만의 왜군에 비해 조선관군은 8천명) 적을 상대로 싸웠던 것이다. 둘째 정보전의 대가였다. 정암진 전투 당시 전라도는 쌀이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이기에 조선 조정은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지역이었고 반면 일본군에게는 꼭 뺏아야 할 전략지역이었다. 왜군 6부대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전라도 진격 작전을 지휘하고 고바야카와의 휘하 부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는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경상도 의령으로 진격한다. 음력 5월 26일 에케이의 2000명 병력은 정암진 대안에 도착해 지역 주민을 동원해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해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곽재우의 정찰병들은 숨어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밤 사이에 곽재우는 군사들을 동원해 나무 푯말을 옮겨 늪지대에 꽂아두고 요소요소의 숲에 군사들을 매복시켜두었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의 일본군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허우적거리자 곽재우의 의병군이 때맞추어 이들을 전멸시켰고, 다시 왜의 주력군이 남강을 도하했으나 정보를 알고 미리 대기하던 곽재우 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 6부대는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였다. 셋째 심리전의 대가였다. 그는 매번 전투에서 진두 지휘하였고, 그 때마다 붉은 갑옷을 입었다. 붉은 색은 피의 색이다. 아군에게는 피가 들끓게 하고, 적들은 연전연패하자 붉은 갑옷만 보면 도망가기 바빴다.
임진왜란의 의병을 민중민주주의 사관에 입각한 사람들은 “민중이 항쟁의 중심에 서서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각처의 의병장은 그 당시 재야 엘리트였던 선비였다. 당시는 농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던 때다. 농촌 민심은 도시 민심과 다르다. 도시 민심은 시간이 중심이 된다. 촛불집회가 촛불이 된 건 밤이 되어야 업무가 끝나고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 민심은 공간이 중심이다. “저 사람이 누구여? 재 넘어 문가네 둘째 아들 아녀? 그 애비가 주정뱅이인데? 쟈도 별 볼일 없는 거 아녀?” 이런 식이다. 임란 때도 도시 민심은 사나워 선조가 피난 간 뒤에 궁궐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그러나 농촌 민심은 선비들 중심으로 뭉쳤다. 이것은 엘리트들이 처신을 잘 했기에 자발적 모병이 가능했던 것이다. 곽재우는 후세 지식인들이 두고두고 본받아야 할 귀감이다.
[나도 한마디]
봉영
조선군의 의병대장이었던 곽재우의 모습은 평상시 쓰던 갓은 물론 하급 군졸이나 군관이 쓰던 전립이 아닌 무관 투구를 썼을 듯...사진의 말 궁둥이 4자와 구두, 바지 그리고 배경이 좀 이상하지만.. ㅋㅋ
곽재우 장군의 또다른 뛰어난 점은 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되는 1600 년, 일본과 화친을 할 것을 상소한 점,.... 제일 왜와 열심히 싸웠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그는 이 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지만, 반대파들은 또다시 함부로 사직했다고 탄핵, 결국 전남 영암에서 2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