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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七言律詩 江舍偶吟 二首
이름   봉영(峰瑩) 등록일   2018-03-17 오전 11:02:00
e-mail   jamespama@hanmail.net
내용




七言律詩 江舍偶吟 二首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곽재우(廓再祐)






































































1596년(선조 29) 서얼출신으로 조정에 불만이 많았던 이몽학이 한현, 김경창 등과 함께 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데다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흉악해진 틈을 타서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 부여)에서 농민 6~7백 명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의병장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에 이에 속은 농민들이 수천 명이나 가담하여 홍산,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충청병사 이시언이 이끄는 토벌군까지 물리치고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이몽학군은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는데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의 뛰어난 전략과 계책에 휘말려 반란군은 홍주성전투에서 패배를 당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호남에 주둔하고 있던 대원수 권율장군을 진압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호남의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을 향하게 하여 이미 패퇴한 반란군들에게 마지막 타격을 가하였다. 전세가 급전하자 이몽학은 부하 김경창에 의해 수급이 잘리고 잔당들은 모두 항복하였으며 비로서 이 난은 평정되었지만 거짓소문에 휘말렸던 의병장들은 억울하게 체포되어 선조에 의해 친국을 당하는 과정에서 홍계남과 곽재우는 풀려났으나 김덕령은 가혹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사망하였고 최담령은 결국 처형되었다. 선조는 이때부터 의병장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이순신 등 공훈이 많은 관군 장수들 역시 의심하며 경계하였다. 선조가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우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순신은 유성룡에 의해,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같은 문하생들이었던 이산해, 정인홍 등의 구명운동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으나 그후 두 장수는 권력의 무서운 속성과 비정함에 많은 회한을 느꼈으리라 짐작된다.

봉영

































































































곽재우(郭再祐; 1552 - 1617년)의 약력을 소개하자면 조선 경상도 의령 출신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생이었다가 나이 33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지만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슬러 급제한 지 얼마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어 낙방되었다. 이에 평생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고향 현풍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40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피난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2천 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신출귀몰하게 왜군을 물리치고 함안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전투에서는 왜군 2만 명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에도 수차례 왜군 보급선을 기습하여 왜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관군의 패배와 그의 연전연승은 자주 비교되었고, 관군들 중에는 그를 시기하는 이들도 많았는데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특별건의로 석방된 적도 있고 그의 의병활동의 공이 워낙 컷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는 그를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에 임명하였다가 비변사의 추천으로 정5품 형조정랑을 제수하였고 이어서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과 문관벼슬인 통정대부(정3품)를 겸하게 되었다. 이듬해 1593년(선조 26년)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고 삼가(三嘉), 의령(宜寧), 단성(丹城), 고령(高靈) 및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고 무너지거나 파괴된 성곽을 보수, 수리하였다. 그해말 진주목사에 임명되고 경상우도조방장을 겸임하였고, 1595년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로 귀향하여 다시 은둔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모함을 받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하여 문초를 받았지만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때 곽재우와 절친한 사이였던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 일로 곽재우는 사실상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조선 정부는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를 제수하였고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마침내 전란이 끝난 뒤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599년(선조 32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사양하였다가 상이 끝나고서야 부임하였다. 1600년(선조 33년) 일본과 화친을 할 것을 건의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까지 당하자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로부터 함부로 사퇴하였다는 이유와 전 해 부임을 지체한 점 등을 구실로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02년 유배된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해 고향 현풍에 돌아와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창녕 창암진(지금의 도천면 우광리) 낙동강변에 정자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는데 선조로부터 다시 거듭 출사 요청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년) 찰리사(察理使)가 되었는데 재직 중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단행하였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직도 사직하였으며 이어서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조정에서는 다시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과 가선대부 행용양위 상호군에 제수하였으며 그 뒤 동지중추부사 한성부 우윤을 지내다가 1605년 다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607년(선조 40년)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1609년(광해군 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선조와 광해군, 북인 정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그는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또한 동문수학하였던 당대의 최고 권력자 영의정 이산해, 정인홍 등과도 생각이 달랐으므로 그들과의 교제도 꺼렸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여러번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출사할 것을 간청하여 결국 그해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의 부총관, 행호분위부호군, 호분위대호군 등을 지냈다가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부임하였고 임기가 만료된 1612년(광해군 4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사형이 거론되자 그는 인륜이 무너졌다고 분개하였고 1613년(광해군 5년)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1617년(광해군 9년) 향년 66세로 망우정에서 사망하였다. 광해군의 명에 따라 장례비와 장례물품이 조정에서 지급되었고 바로 예관을 파견하여 장사를 지냈다.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추모히기 위하여 의령 가태동에 충현사라는 사당을 세웠으며 그의 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광해군의 사액이 내려졌다. 훗날 숙종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1709년(숙종 35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고, 다시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호는 망우당(忘憂堂),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으며, 그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봉영

이렇게 장황하게 곽재우 장군의 이력을 소개한 것은 우리 민족 만고의 영웅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곽 장군의 애국심과 충절을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이 되새기며 장군의 13대손 곽동익 인형(仁兄)이 올렸던 장군의 한시 칠언율시 강사우음(江舍偶吟) 제一首에 이어 제 二首를 발견하고 아래에 함께 소개하면서 그 두 시의 배경과 의미를 소상히 파악하고자 함이니 강호 제형들께서는 부디 지겹다 여기지 마시고 일람통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번역이 아무래도 턱없이 부족한 점을 혜량하여 주시고 한문에 조예가 깊은 곽형께서 다시 수정해주길 앙망합니다.












































    江舍偶吟-1(강사우음-1)

    巖間犬吠知聲應(암간견폐지성응)
    바위 사이로는
    개짓는 소리


    水裏鷗飛見影孤(수리구비견영고)
    물속에 외로이 비치는
    갈매기 그림자


    江湖閑適無塵事(강호한적무진사)
    강호는 한적하나니
    속세 일 따위없다네


    月夜磯邊酒一壺(월야기변주일호)
    달밤엔 낚시터로
    술병 하나 들고가네


    下有長江上有山(하유장강상유산)
    아래로는 長江
    위로는 산일세


    忘憂一舍在其間(망우일사재기간)
    근심잊고저 작은 정자
    그 사이에 지었네


    忘憂仙子忘憂臥(망우선자망우와)
    근심없는 신선처럼
    근심없이 누웠네


    明月淸風相對閑(명월청풍상대한)
    밝은 달 맑은 바람
    마주하며 한가롭네



      한시번역; 곽동익(경북고 50회)










      江舍偶吟-2(강사우음-2)

      朋友憐吾絶火煙(붕우련오절화연)
      친구들은 내가 곡기를 끊은 것을 불쌍히 여겨
      共成衡宇洛江邊(공성형우락강변)
      함께 일구어 낙동강변에 집을 지어주었다네

      無飢只在啗松葉(무기지재담송엽)
      솔잎만 먹고 지내도 허기는 면할 수 있고
      不渇惟憑飮玉泉(불갈유빙음옥천)
      맑은 샘물 마시면서 목마르지 않다네

      守靜彈琴心澹澹(수정탄금심담담)
      고요함 지키며 거문고 타니 마음은 담담하고
      杜窓調息意淵淵(두창조식의연연)
      창문 닫고 호흡을 고르니 생각이 깊어지네

      百年過盡亡羊後(백년과진망양후)
      백년이 다하도록 학문의 길을 잃고 헤맨 뒤에
      笑我還應稱我仙(소아환응칭아선)
      나를 비웃어 도리어 나를 신선이라 칭하네

        한시번역; 봉영


* 망양(亡羊)은 진리, 학문의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빗댄 것 같네요.

























[나도 한마디]
오중관  이런내용은 저작권등록하고 출판합시다 최근 불고있는 인문학강좌중 내가들은 것중 백미요 2018-05-12 오전 7:40:00 x

오중관  현풍산 오중관 오랬만에 들리니 나의 외우 박문송 봉영 동익 2018-05-12 오전 7:38:00 x

곽동익  큰 감탄을 거듭합니다. 다시금 여러 유고를 살펴 보며, 되돌아 보게합니다. 2018-04-17 오후 2:04:00 x

봉영  망우집은 후손들에 의해 두번 재편되었고 또 여러편의 망우선생문집도 있는데 위의 두번째 시는 퇴거비슬산(退去琵瑟山)이란 제목을 붙이기도 하지만 강사우음(江舍遇吟) 제 2수로 분류된 곳도 많네요. 현풍 비슬산에서 내려와 창녕 낙동강변에 망우정을 짓고 거처를 옮겼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후자의 제목이 더 맞을 듯... 2018-03-17 오후 12:49: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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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言律詩 江舍偶吟 二首 2018-03-17 봉영(峰瑩) 20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