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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설중매(雪中梅)
이름
봉영(峰瑩)
등록일
2008-02-23 오후 2:59:00
e-mail
내용
매화(梅花)는 아름답다. 그러나 설중매(雪中梅)는 더욱 아름답다. 자고(自古)로...한서(漢書)라는 역사책에도 나오듯이 경사이우(經師易遇), 인사난봉(人師難逢)이란 말이 있다. "글 가르키는 스승은 만나기 쉬어도 사람 만드는 인격이 높은 어진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에 견줄만한 참된 인간스승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선생은 일생동안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문하생으로 대학자, 대경륜가, 대정치가등 국가의 동량지재만도 무려 318명이나 배출하였다고 한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같은 대국난을 극복하고 두차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결국 선생께서 인재양성을 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선생의 학문이 개화(開花)한 것은 40대 중반 충청도 암행어사로서 민정을 두루 살펴본 연후에 48세때 단양군수를 역임했던 시기 부터였다는데 그때 선생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선생께서 단양으로 부임하시자 방년 18세의 두향(杜香)이란 관기가 나아와 자기가 기르던 매분(梅盆) 하나를 드렸는데 그 매화야말로 일찌기 북송의 대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읊은 옥골빙혼(玉骨氷魂)의 설중매(雪中梅)였던 것이다. 후학이었던 선조때 시인 권필(1569-1612)도 매화가지를 빙골(氷骨) 그 꽃잎을 옥시(玉魚思; 옥같은 뺨)라 하였으니... 선생께서 고고한 매화의 품격과 속성을 관조(觀照)하시고 그것을 늘 곁에 두시어 혹애매(惑愛梅)하신 것이야말로 선생의 학문과 인생행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듯하다. 선생께서는 매화라는 단일소재로 여든 다섯 제목(85題)에 118편의 시문을 자필로 지으셨으며 우리나라 문학사상 유례없는 퇴계매화시첩(退溪梅花詩帖)을 남기셨다. 나이 60세에 완공한 도산서원에서도 매화 수주를 심어 저 유명한 도산매원(陶山梅園)을 만드셨으니... 오늘날 신권화폐 천원의 앞면을 장식한 매화 20송이는 바로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매화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선생께서는 당시 부인과 아들 하나를 먼저 여의고 크게 상심하고 있던 터에 관기 두향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선생의 초지일관 학문매진에 더욱 좋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선생께서 두향이가 만일 기생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정경부인이 되었을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 두향의 몸가짐과 인품과 학식 또한 대단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두향이가 당대의 대학자요 큰 인물이었던 선생을 깊이 흠모하고 그에게 가슴을 도려내는 듯 뼈아픈 사랑을 바침으로써 그녀가 바로 설중매임을 입증하였다. 단 9개월간의 짧은 단양군수직을 떠나서 죽령을 넘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근가기 전날밤...선생께서는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라고 말씀하시자 두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 옛날 안동도호부에서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지던 동종이 죽령에서 500명의 장정이 끌어도 꼼짝을 않자 운종도감이 동종 몸통에 붙어있던 36개의 유두(乳頭)중 하나를 잘라내어 안동도호부의 남문루 밑에 파묻고 삼가 제(祭)를 올린 후에야 비로소 동종이 다시 움직였다는 고사(故事)를 아시나이까? 백살을 못 사는 사람도 생이별을 서러워하거늘 8백살이 넘어 숱한 애환을 지닌 범종이 어찌 고향을 쉽게 버리고 죽령을 넘겠나이까? 나으리와 소첩과의 인연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왔사오니 이제 나으리께서 정녕 소첩을 떠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부디 소첩의 젖꼭지 하나를 칼로 베어내고 떠나시옵소서. 그래야만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미련이 끊어질 것이나이다. 두향이가 저고리 앞 고름을 풀어 가슴을 헤쳐 보이고 지녔던 은장도를 건네주며 선생의 결행을 촉구하자 선생께서는 젖꼭지대신 저고리 옷깃을 잘라내시는데 당시에 저고리 옷깃을 자름은 절연(絶緣)의 표시라... 나으리께오서 소첩의 저고리 옷깃을 자르셨사오니 이것으로 나으리와의 인연이 다 된 것을 알겠나이다. 상원사의 동종에서 젖꼭지를 잘라내어 남문루에 묻고 제사를 드렸듯이 소첩도 이 저고리를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강선대 바위 밑에 고이 묻으오리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붇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히겠나이다. 나으리~... 이말을 듣고 선생께서는 두향이 치마폭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적어 주었다고 한다.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測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음이여... 이에 대한 화답으로 두향이도 시 한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들고 슬피 울 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轉輾寒衾夜不眠 鏡中憔悴只堪憐 何須相別何須苦 從古人生未百年 찬 자리 팔베개에 어느 잠 하마 오리 무심히 거울 드니 얼굴만 야윗고야. 어찌 이별은 이다지도 괴로운고? 옛부터 인생은 백년도 못 채우거늘. 떠도는 구름은 임의 마음이요. 서산에 지는 해는 나의 정일진데 손을 흔들며 그대는 떠나가니 가는 말 울음소리 못내 서러워라. 두향은 선생께서 떠나신 후 신임군수에게 청을 하여 자신은 퇴계선생을 평생의 정인으로 사모하는 연고로 더이상 관기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였는 바 신임군수가 이를 허락하고 기적에서 빼주었다고 한다. 그후 두향은 강선대 아래 움막을 짓고 수절하였으니 몇년 후 선생께서는 인편을 통해 아래의 시를 보냈다.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누렇게 바랜 옛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오. 두향은 이 시 한편을 받고 종일 눈물을 흘렸으며 그후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로 불렀으니 사람들이 일컬어 상사별곡(相思別曲)이라 하였다. 그후 20년의 세월이 지나 1570년... 선생께서는 그동안 두향이가 선물한 매분(梅盆)을 마치 두향이를 보듯 곁에 두고 애지중지 하셨다가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서 "매형(梅兄)에게 물을 잘 주어라."는 말을 남기고 향년 69세의 위대한 생애를 마감하셨다. 선생께서 임종하시던 날 두향은 꿈을 꾸었는데 하늘의 큰 별이 자신의 가슴에게로 떨어진 지라... 소복을 하고 며칠을 걸어서 안동(安東)에 당도하여 님의 묘소에 술 한잔 올리고 목놓아 울다가 돌아오니 그때부터 움막에서 두문불출 죽기를 작정하였다가 이듬해 선생의 기일에 이르러 강선대에서 몸을 던졌다. 선생의 제자이자 임진왜란때 영의정을 지낸 명신(名臣)인 이산해(李山海)는 스승의 애인인 두향이 강에 투신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 사람을 동원하여 사흘만에 시신을 수습하여 강선대가 바라보이는 강안 양지바른 곳에 묻어 후히 장사하고 자손들이 대대로 두향의 무덤을 돌보고 제(祭)를 올리도록 명(命)하였으니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임이 분명하다. 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퇴계(退溪) 이황(李滉)
VIDEO ♪ 설중매- 명상음악♪아름다운 이별- 명상음악
[나도 한마디]
박문송
좋은 지적을 하셨읍니다. 아무리 도학군자라도 조강지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위선자라 해야겠지요. 선생께서는 27세, 46세에 첫째, 둘째 부인과 사별하시고 그후 두향이를 괴이셨으니 돌아가신 분들도 이해하셨을 겁니다. 더군다나 둘째부인 권씨는 기묘사화에 가족을 잃고 광인(狂人)이 되셨으니...
2008-02-26 오전 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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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太山)
친우 덕분에 영상좋고, 음악좋고, 구구절절한 내용도 좋소이다. 고고한 플라토릭 러브를 하셨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럼 조강지처는......
2008-02-25 오후 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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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매(雪中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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