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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향생각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09-04-27 오후 3:51:00
e-mail   leejiuk@online.ru
내용
문송이 올린 정겨운 사진들을 보니 고향생각이 새록새록 절로 난다.
이 지구상 아무곳을 돌아다녀도,
메 높고
골 깊고
물 맑고
바다 가깝고
4계절이 뚜렷한
나라가 몇 있을 까?(과테말라 빼고....)

조선시대 유배(流配)가 어떻게 형벌이 될 수 있을까?
학교 시절, 내가 한 때 가져본 의문이다.
혼자서 산에도 올라가고, 고기도 잡고… 혼자 재미있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혼자 이국을 떠돌아 다니고부터야
“아, 유배란 참으로 가혹한 형벌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등산이 스포츠로 자리잡게 된 건, 우리가 잘 아는 “윔퍼”텐트의 제작자 윔퍼가 몽블랑을 오르던 18세기 후반이고, 특히 일반인에게 등산이 취미로 된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 조선 시대에 사냥 아니면 산에 갈 일이 없다.(김 병연 같은 방랑시인 빼놓고.....)
교통, 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강계,제주도, 해남 등으로 댕그렁 혼자 보내는 건, 요즘의 감옥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요새의 감옥은 최소한 먹고,자는 건 해결해 주니까……그리고 가끔씩 면회오는 사람도 있으니…..
아무도 반기지 않는 낮선 동네…. 말 동무도, 친척도, 가족도 없이
혼자 객지를 방황하다, 겨우 먹을 거리 장만해 들고 오면서, 人家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오손 도손 서로 다둑거리는 그림자가 문풍지에 비쳐지는 걸 바라보는 나그네……
고향에 두고온 처자식을 그리며, 온기 없는 방바닥에 댕그렁 드러누워 천정만 바라보는 심정….

그런데 고향없는, 나라없는 서러움을 정말 뼈져리게 겪은 분들이 있다.
바로 지금, 러시아, 우즈벡, 카자크 등등 CIS에 걸쳐 있는 속칭 고려인이라 부르는 우리 동포들이다.
우리 동포들이 연해주라 불리는 현재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진출한 건 조선시대 말이었다.
조선 시대에 월경,즉 국경을 넘는 건 중죄에 해당하는 불법이었다. 농경사회에서는 머리 수 자체가 노동력이고, 노동력은 곧 국력이다.
그러나 먹고살기 힘들면 나라가 법으로 막아도 어쩔 수 없다.
**
여담이지만 조선시대 효종이 “북벌정책”이란 한창 커나가는 청나라를 친다는 헛소리를 하지 말고, 월경을 허용해 연해주 시베리아쪽을 개척했더라면 지금 동시베리아의 광활한 땅 중 반 이상이 한국령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러시아의 짜르(이반 4세)는 감세혜택 만을 주고 모피업자 하나를 부추기어 이 업자는 예마르크라는 코사크족 소수 기병무리와 불과 70 년만에 우랄 동쪽부터 연해주까지 다 먹어 버렸다. 국가 지도자의 생각 하나 차로 땅이 수백배 차이난 것이다.
러시아가 흑룡강까지 진출해 오자 청나라군과 교전하였고 청나라는 그들이 자랑하는 정예 팔기군1500 여명의 병력으로 싸웠으나 206명으로 구성된 러시아군 및 그 함정과 싸워 대패하고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2차에 거쳐 파병을 하였는데 현지주민을 활용한 첩보, 유인작전, 우수한 사격술(파병요원들이 주로 함경도 포수들이었다), 지휘관의 용의주도한 작전으로 2차례에 걸쳐 러시아군을 박살내 버렸다(소위 1,2차 羅禪정벌로 1차는 1654년 함북병마우후 변급이 이끄는 100 여명이 370 명의 러시아군을 섬멸했고-이때 조선군들이 강가 버드나무를 엄폐물로 삼아 함정 위의 적을 사격하는 동안-이를 柳柵전술이라 불렀다- 청나라 병사들은 언덕 위에서 구경만 했슴- 2차는 1658년 함북병마우후 신유가 265명을 이끌고 500 여명의 러시아군을 섬멸하고 13 척의 함정, 26척의 호위선 대부분을 불태웠다. 싸움 전에 청군과 조선군은 사격시범을 하였는데 조선군은 100명 중 67명이 60보 밖의 과녁을 명중시켰는데 청군은 100 명중 2명이 겨우 명중시켰다. 전투 때 조선군은 화승 (火繩)을 사용하는 조총으로 쏘고 러시아군은 현대식 소총(격발식)으로 쏘았는데도 조선군이 이긴 걸 보면 조선의 사격술은 예나 지금이나......)**

어쨌든 월경 불법조치에도 불구하고 1863년에 조선인 몇 세대가 먹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 지금의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들어갔고 이 인구는 점차 불어 한일 합방 이후에는 연해주 거주 조선인이17 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계획을 꾸민 곳도 연해주의 중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였다.
구 한말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여행작가로 세계 각처를 탐사한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국내에 있던 한인을 지지리 못난 인간들로 본 반면 연해주 한국인들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러시아의 자치구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같은 동포인데 지도자에 따라 개성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연해주 동포들은 공산혁명 후 스탈린에 의해 엄청난 핍박을 받는다.
1937년 10월(이 해에는 겨울이 빨리 닥쳐 10월에 얼음이 얼었다), 갑자기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한인자치구를 애워쌌다.
그리고 가재도구 일체, 농기구 일체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폭동을 우려하여) 일주일 분 식량만 챙기게 한 뒤, 강제로 화물열차에 태웠다. 그리고 콩나물 시루보다 더 빽빽히 사람을 실은 화물열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며칠 낮인지 며칠 밤인지를 알 수 없을 만큼 수천 킬로를 달렸다.
그리고 중간에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황무지에 이르러 반쯤을 버렸다. 그리고 더 달려 지금의 카자크스탄 황무지에 이르러 다 버렸다.
수 차례 이렇게 하여 17만명을 다 황무지에 버렸다.
기아와 추위로 운송도중에만 2만명이 죽었다.
현지 주민들이 빵 몇조각을 나눠주지 않았다면 모두 몰사했을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겨울 동안 죽었다.
우선 추위를 막을 집이 없어 토굴을 파고 원시인처럼 생활했으나 토굴은 환기가 되지 않아 노약자들은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어갔다.
혹독한 겨울을 나자 농사를 지으려 했으나 호미도, 삽도 없었다.
결국 숟가락으로 물고랑을 내고, 호미 대신 손이나 나뭇가지로 흙을 파서 씨앗을 심었다.
스탈린이 이렇게 한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다. 그 당시 황무지였던 중앙아시아를 부지런한 한국인을 통해 개발하기 위해서… 등등 . 그러나 그러려면 농기구의 소지를 허용했어야 했다.
내가 보기엔 연해주가 너무 한국인으로 와글거리고, 경제권 등이 한국인들에게 좌우되니까 연해주가 어느 때가 되면 한국 땅이 되어버릴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체첸인들도 남서쪽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런데 체첸인들과 한국인들은 다른 점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모질게 학대했는데도 몇년 뒤, 황무지를 개척해 금방 농업을 이루고 쏘련 치하에서 모조리 모범 협동농장(코르호즈)으로 컸는데 반해 체첸인들은 빈둥거리며 구걸 또는 부랑자 생활을 하다가 구쏘련 해체 후 돌아갔다.
스탈린은 원래 그루지아 출신이었는데, 지금 구쏘련 해체 후 그루지아가 독립하고 그 후 러시아와 전쟁까지 치른 걸 저승에서 봤다면, 이 강제이주 조치에 대해 가슴을 치고 통곡했을 것이다.




[나도 한마디]
노타이  문송이나 지욱이 모두 살아 있는 석학들이다. 자네들은 글이나,예능 그 어떤 분야로 가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욱이는 지금 러시아에 있다는 것인지.., 보고싶은 얼굴들.. 2009-05-03 오후 3:35:00 x

임병호  글 잘 읽고 노래 잘 들었네.....꼭 만나서 소주 한 잔 하고 싶구나..연락 바라네.... 2009-04-29 오전 12:42:00 x

박문송 
2009-04-28 오전 11:54:00 x

.  구한말 일제가 침략해오던 당시 호랑이사냥군들의 모습인데 아래 기사를 보면
종종 그들의 표적은 호랑이가 아니라 남의 땅을 빼앗은 일본놈 대갈통들이었다.
2009-04-28 오전 11:53:00 x

.  These guys had an unusual talent. They took perfect aim at a Tiger,
pulled the trigger and amazingly 1000 yards away and off to the side
a Japanese soldier would fall off his horse.
2009-04-28 오전 11:51:00 x

.  The arrogant bureaucrats of the Japanese Military and Political
occupiers probably would have called these native born sons of
Korea....., "Insurgents".
2009-04-28 오전 11:50:00 x

유심조  사계절은 인생을 풍부하게 만듭니다.그리고 지난 일이란 그리운 것도 있고 가슴 아픈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한국에서도 너무 힘이 들고 외로운 넋들이 오늘도 여기저기 방황하고 있습니다.강제 이주로 황야에 버려진 연해주 동포들의 이야기도 큰 인생의 길잡이가 될것입니다 2009-04-28 오전 11:12: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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