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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여성은 위대하다!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09-07-28 오후 5:40:00
e-mail   leejiuk@online.ru
내용
1. 천하의 돌쌍놈과 어머니
어머니!
어떤 단어도 이보다 위대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선할수도, 성스러울수도 없으므로 나는 이 제목으로는 어떤 산문도 시도 쓸 수가 없다. 즉 “어머니!” 단어 하나가 그 모든 걸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내가 얼마나 천하의 돌쌍놈이었는지 고백하려 한다.(우리 고향에서는 “천하의 돌쌍놈”이 최악의 욕이었다. “호로자식” “개백정”이런 말은 잘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학부형 모셔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한 번 빼놓고는 지킨 적이 없다. (그 한번은 고3 때 김숙교 선생님이 “이 성적으론 어느 대학에도 갈 수 없다”고 안 모셔오면 찾아가겠다고 했을 때다.1,2학년 때 너무 농땡이를 친 나는 2학년 말 성적이 꼴찌에서 몇 번째였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나는 어머니가 소학교(초등학교)도 안 나오신 걸 알기 때문에 혹시 선생님과 얘기하다 챙피당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초등학교 때 어머니는 시골에서 막 나온 후 칠성시장에서 노점상으로 국수를 말아 팔았다.
그것도 친구들 중 누가 보지 않았나 학교에 와서 알아보면 어쩌나 부끄러웠다.

내가 어머니를 높이 산 유일한 때는 내가 초등 2년까지 양동에 있을 때였다. 사람들이(주로 안 어른들) 자주 우리집에 왔었는데 그 사람들이 와서 어머니 한테 무슨 창호지같은 걸 말아 받아가고 며칠 뒤면 꼭 떡이며 한과, 엿 등이 담긴 걸 가져왔는데 그 때 그 안에 든 떡 등의 맛은 그 뒤 어느 곳 어느 잔치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최상의 것이었고, 최고의 맛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한 건 송화가루로 빚은 자그만 떡이었다.
양동을 떠난 후 “대구쌍놈”이 된 후 나는 양동의 추억은 다 잊어버렸다.
그 뒤 내가 제일 즐거운 때는 방학날이 되기 무섭게 책보따리를 싸 영천 임하골 외할머니 댁에 가는 것이었다.그리고 방학이 끝나는 바로 전날 대구로 돌아왔다.
그 때도 어머니는 신암동부주차장(당시 이름)까지 오셔서 내가 탄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그것도 남들볼까 챙피했다.
나는 즐거운데 왜 우시는가?
어려운 살림에 한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쌀이라도 아끼려고 방학종이 치자마자 하나 뿐인 아들을 친정으로 보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눈물을 보이신 뒤의 깊고도 깊은 사연을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알았다.

외할머니는 10명이 넘는 외손자들 중 유독 나를 제일 귀여워했다. 거기에도 사연이 있었다.
아무튼 나는 도착하는 날부터 신이 났다. 외할머니는 낮에는 논일,밭일을 하시고 밤이면 마(麻)껍질을 벗겨다 그걸 삼베를 짜기위한 가느다란 섬유로 만들기 위해 가는 빗 비슷한 걸로 훑어내는 힘드는 작업을 하고 계셨는데 그 일이 끝나는 밤 10시쯤이면 친한 할머니 몇분이 모여들었다. 게 중에는 “정승할매”라고 정승하신 분의 따님이란 친척이 있었는데 이 분은 야밤에 산을 두개씩이나 넘어 오셨고 가끔 “납닥바리(삵괭이)”를 만나 혼났다며 내게 산중에서 납닥바리를 만나면 퇴치하는 법을 일러주시곤 했다.
아무튼 이 분들이 모여 앉으면 나는 신소설-100 여 페이지로 세로쓰기로 되었는데 내가 가지고 간 것이었는지 외갓집에 있었던 건지는 기억 안남-을 소리높여 읽어갔고 두어시간에 걸쳐 낭송이 끝나면 할머니들이 칭찬을 해 주었다(나는 내가 재미있어 읽은건데…). 한번은 낭송이 너무 일찍 끝나 나는 내가 가져간 “학원” 잡지의 끝부분 중 유머코너를 읽었는데 그 내용은 “지나가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보고 ‘흥, 호박 꽃도 꽃이라고…’하자 여학생 왈 ‘흥 멸치도 고기라고…’라 했다”는 것이었는데 모여있던 할머니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외할머니가 외손자 중 나를 특히 반긴 사연은 나중에 알고본 즉 이랬다.
내가 돐무렵, 어머니는 점심을 가지고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방앗간에 가시고 외할머니가 나를 보고 계셨는데 잠간 화장실에 간 사이 (시골 화장실은 멀리 떨어진 마당 끝에 위치),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밀치고 옆방으로 가 화롯불에 담긴 싯뻘건 숱더미를 휘저었고 나는 오른 손에 회복불가능의 화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하나 뿐인 아들을 화상을 입혔다고 시어머니(나의 친할머니)는 어머니한테 “5년간 친정 출입금지”의 중형을 선고 하였다.
아버지는(나의 외조부)는 일찍 타계하셨고 하나 뿐인 남동생(나의 외삼촌)은 군대에 징집되어가고 논일 밭일은 외조모와 며느리 손에만 의존하는 줄 아는 어머니가 5년간 친정을 못 간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러니 친정으로 떠나는 아들을 보고 버스 바깥에서 울 수 밖에……

양동에서 어머니에게 떡이랑 가져다 준 비밀은 84년 돌아가신 후, 장례식 때에야 풀렸다. 상주가 된 내게 누가 와서 ,
“네 어머니 생전엔 글 솜씨가 뛰어나고 글씨체가 너무 예뻐 월성군은 물론 경주 사람들까지 와서 ‘사돈지’ 글을 자네 어머니께 부탁했다.”
즉 어머니는 전통관습인 혼인전 안사돈끼리 주고받는 편지를 대필해 주고 그 분들은 답례로 떡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근데 나는 어머니를 무식군 취급만 했으니 당대의 돌쌍놈!

어머니가 소학교도 못나온 비밀도 그때 풀렸다.
“너희 외조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당대의 유학자로 남들이 힘들어하는 3년 시묘(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 옆에서 떼집 짓고 손톱,발톱 안 깎고, 머리 안 자르고, 고기 안 먹고 지내는것—여간 깡이 아니면 못한다. 그리고 왜정 때는 금지했다 )를 두번씩이나 하신 분이다. 근데 서당 훈장을 하시면서 애들은 절대 소학교에 보내지 말라하셨다.”
그럴만도 하다. 서당 훈장이 강력한 라이벌인 소학교를 반길리가…

커서는 또 한번 “천하 돌쌍놈” 짓을 저질렀다.
내가 여수 처녀와 눈이 맞아 결혼하려 하자 우리집은 물론 처가집까지 결사반대했다.
나는 고민 끝에 극단적인 일을 저질렀다.
우편엽서를 사다 청첩장을 만들어 일가친척들에게 모월모시에 결혼한다 발송하고,
아버지, 어머니께 그날 친척들이 다 모일텐데 두 분이 ‘오실려면 오시고, 말면 마시고….’ 완전 조폭식 협박을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며칠 밤을 뜬 눈과 울음으로 샌 끝에 아버지를 설득, 겨우 퉁퉁부은 모습으로 예식장에 나오셨다.
이제 내 자신이 “영감님 BR밑에 메뚜기 뛸” 나이가 되어 생각하니 석고대죄를 수만번 해도 모자랄 죄… 그러나 이미 고인들은 간 곳 없고…….

내가 소시적, 어머니는 아버지가 방앗간에 불을 내고 실의에 빠져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시자 ‘이래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가 없다. 차라리 도회지로 나가자’라 설득했지만 아버지가 듣지 않자 모진 결심을 하고 여동생들만 데리고 걸어서 ‘시태재(안강-영천 사이의 고갯길)’을 넘어 대구로 나오셨다. 우린 얼마동안 이산가족이 되었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셋방살이 하면서 ‘연탄가스’를 몇번이나 마셨지만 그나마 덕택에 나와 동생들은 학교라도 제대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국수장수’가 부끄러워 ‘학부형 소집’통보도 깔아뭉갠 이 못난 돌쌍놈!
朱子十悔를 왜 일찍 몰랐던고…..
아직도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무들! 제발 효도하시구려!

2. 밤의 마녀들



2차 대전 때 구쏘련에서는 여성 조종사들이 대단한 활약을 했다.
이들은 주로 야간에 전투기들을 몰고 독일 진영에 날아가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독일군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독일군들은 이들을 “밤의 마녀들”이라 불렀다.
비행기가 부족할 때는 때로 연습기를 몰고 출격하여 창문을 열고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독일군들은 이 “밤의 마녀”를 격추하거나, 죽이거나, 사로잡는 사람은
무조건 독일군 최고훈장인 “철십자 훈장”을 수여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러자 밤의 마녀들이 출격하는 공중전에서는 항상 Messerschmitt기(독일 전투기名)가 벌떼처럼 달라 붙었다.
즉 같은 편대에서 남자들과 같이 출격하면 독일 조종사들은 다른 비행기는 제쳐두고 마녀들의 비행기를 집중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마녀들은 항상 1:10의 공중전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이 魔女아닌 碼女들은 대부분 공중전에서 산화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인 LYLYA LITVYAK 의 이야기이다.
빼어난 미녀로 알려진 그녀의 본명은 Lydia 인데 항상 그녀의 愛機에 백합을 그려 다녔기 때문에 LYLIA란 애칭으로 불렸다. 독일군들은 이 백합을 백장미로 오해하고 “White Rose of Stalingrad”라 했고, 독일 조종사들 사이에선 “백장미를 격추하라!”는 게 Motto가 되었다.
그녀는 수많은 독일 전투기를 격추했고(공식확인된 것만 12대), 1943년 8월 1일 폭격기 편대를 호위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독일 전투편대의 기습을 받았다. 독일 전투기 중 8대가 그녀만을 타겟으로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8대 1의 처절한 공중전 끝에 그녀는 마침내 격추되어 22년의 꽃다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녀의 시체는 36년이 지난 1979년 한 지방도시의 야크기 날개 밑에서 발견되었다.

3.아기곰의 최후

[나도 한마디]
이지욱  과찬 부끄러버요! Lylya Litvyak에 대해 더 궁금하신 친구들은 http://mysite.pratt.edu/~rsilva/litvyak.htm 로 들어가보시길... 2009-07-30 오후 6:17:00 x

노타이  지욱이의 글과 아기곰의 동영상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줍니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하신 분들이고,특히 지욱이의 심정이 마음 깊이 와 닿는 느낌입니다. 원래 내가 얘기한데로, 지욱이는 글을 써야 한다고.., 이런 글도 다 모아놓고..나중에 단행본이라도 만들어야지.. 2009-07-30 오전 3:04:00 x

오중관  이지욱동문 위글을 내년신춘문예 단편소설부문에 응모하세요,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천상으로 이끈다.모든 여성은 여성이다. 2009-07-29 오후 4:06:00 x

김남정   땡큐 ! 2009-07-28 오후 10:07: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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