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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LYLIA LITVYAK의 출현배경
이름   이지욱 등록일   2009-08-03 오후 8:49:00
e-mail   leejiuk@online.ru
내용
1.배경-스탈린그라드 전투

1.1. 의미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치열함, 인명피해상황, 중요성, 그 어느 면에서도 인류역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규모라는데 이의가 없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은 공식기록은 없으나 동원된 군사들이 다 죽었다 가정해도 인명피해는 15만~25만 밖에 안 된다.
을지문덕 장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몰살시킨 수나라의 대군은 압록강을 넘어온 군사 빼기 돌아간 병사를 셈하면 30만명이 단일 전투에서 죽었다.
그런데 1942년 8월 21일~1943년 2월 2일 사이에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양측의 인명피해는 최소170 만~200 만으로 헤아린다.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은 이곳에서 85만의 병력을 잃고(죽거나 포로) 승승장구하던 기세를 꺾고 이후 수세에 몰리게 된다.

1.2. 준비전
1941년 6월 22일, 일명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히틀러는 동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바보! 쪽발이 쉑끼들! 누굴 흉내내는 거야!”
그는 이제 초초해졌다. ‘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빨리 동부전선을 끝내야 한다! 그래서 코카사스 유전지대를 확보하고 아프리카에서 동진하는 에르빈 롬멜군과 합류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모든 전선에서는 현상유지, 소강상태 유지를 명하고 타겟을 코카사스의 길목 “스탈린그라드”로 집중시켰다.
스탈린도 독일의 의도를 간파했다. 게다가 스탈린그라드는 “짜리친”이란 이름의 도시를 공업화해서 “스탈린그라드(그라드는 도시란 뜻)”란 이름을 얻은 자신의 명예가 걸린,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렸다.
(1)민간인은 도시를 떠나 피난가서는 아니된다. 피난행열은 군 이동에 방해가 된다. 여자와 어린아이도 예외가 없다.
(2) 상부의 명령없이 장소를 이탈하는 자는 무조건 즉결처분으로 총살한다.
(3) 군수물자에 참여하지 않는 노동자들과 여자들도 지원병을 구성하여 전투에 참여하라!

1.3. 초반전
서부스텝지역에서 소련군을 질풍노도처럼 밀어부치며 승승장구하던 독일 제 6군,17군,제4기갑군,1기갑군, 루마니아군,이태리군 등 도합 90만명은 1942년
8월 22일 드디어 스탈린그라드 외곽을 에워쌌다.
그리고 8월 23일 드디어 독일이 자랑하는 공군의 무차별 폭격이 시작되었다.
단 하루에 600 대의 폭격기가 시가지를 돌과 잿더미와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단 하루에 4만명의 시민이 폭격으로 죽었다.
그 뒤 독일의 전차부대가 밀려왔다.
그런데 이 전차부대를 맡은 최전선 첫번째 부대는 1077방공포 연대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사포만 쏘아보고 지상군 훈련은 전혀 받지않는 여성 지원병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위치를 고수하며 전차에 맞서 싸웠고 독일 16기갑사단이 그들의 고사포 37문을 모두 파괴하고 우회하여 섬멸할 때까지 싸웠다.
독일군의 전법은 전차,보병,공병,공군지원이 절묘하게 조화된 협공작전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소련군은 “껴안기”라 불리는 근접전을 구사했다.
독일은 근접전을 피하고 싶었지만 공군이 폭격을 너무 잘 해, 높이 8미터가 넘는건물 잔해 때문에 전차가 제대로 진격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근접전으로 응사하고 나중엔 화염방사기 같은 중화기를 사용했다.
이제 싸움은 모든 거리,지하실,골목,공장,계단,집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쏘아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파블로프의 집”이라는 4층짜리 건물은 55일 동안 서로 상대방을 쥐잡기처럼 잡으며 싸웠지만 매 시간 주인이 바뀌었다.
“마마이”라는 조그만 언덕을 두고 하루에 1개 사단을 잃으며 뺏고 빼앗는 게임을 했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다음은 “붉은 별”이란 당시잡지에 쓰인 소련군의 시다.

날짜를 세지 말라. 거리를 헤아리지 말라. 오로지 그대가 죽인 독일군의 숫자만 세어라. 독일군을 죽여라. 이것이 그대 어머니의 기도이다. 독일군을 죽여라. 이것이 소련의 울부짖음이다. 흔들리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죽여라."

이런 선전에 따라 이반 시도렌코라는 병사는 199일 동안의 전투중에 497명의 독일군을 죽여 훈장을 받았다.

2. 중반전
독일군은 3개월의 값비싼 대가를 치룬 끝에 11월 중순 도시의 90 %를 점령하고 소련군을 밀어내고 시 동쪽의 볼가강변에 도착했다.
한편 스탈린은 게오르기 주코브를 불러 반격작전을 일임했다. 주코브는 우리나라 충무공이나 을지문덕처럼, 나폴레옹을 물리친 쿠투조프와 함께 러시아에서 추앙받는 인물인데 크레믈린 광장을 구경한 사람들은 그가 입구에서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을 보았을 것이다.(아이젠하워보다 뛰어난 인물인데 아이젠하워는 나라를 잘 타고나 대통령까지 해 먹었고 쥬코브는 스탈린의 견제를 받아 대전 후 숙정되었다)
주코브는 1939년 5월~8월 몽고,만주 국경 할힌골에서 그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일본 관동군 1개 사단을 훈련도 제대로 안 된 몽고군을 거느리고 박살내어 2만명을 살상함으로써 능력을 검증받았다. (이 대참패로 관동군 중장 미치타로는 해임되고 소,일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며 그 후 독일이 일본에게 동쪽에서 소련을 공격해달라고 애원했으나 묵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코브는 할힌골전투에서 써먹은 적의 양 날개 쪽 약한 부분을 공격해 넓게 적을 포위하고 양쪽으로 협공하는 전략을 입안하여 실천에 옮겼다.
그리하여 시 북쪽의 루마니아 3군을 돌파한 군과 남쪽의 4군을 돌파한 군이 시 서쪽의 칼라치에서 11월 20일 만나 독일 6군을 둘러싼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바바리아 지방에서 이 소식에 접한 히틀러는 작전회의를 소집했는데 육군 사령관들은 빨리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공군참모총장 한스 예손네코는 히틀러가 “공중가교”로 보급지원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예스(항상 예스맨이 문제다!)라 대답했고 후에 공군사령관 괴링도 동의했다.
“공중가교”란 모스크바 전투 직후 데미얀스크라는 곳에서 적에게 포위된 독일 1개 군단을 공중보급을 통해 성공적으로 구해낸 작전 후 붙여진 공중보급작전을 말한다.
이때부터 독일 전 공군이 동원되어 일 500 톤의 보급품을 스탈린그라드 안의 독일 6군, 제 4기갑 사단 등에게 떨어뜨리려는 독일 수송기 및 그들을 호위하는 독일 전투기와 이를 저지하려는 소련의 전투기 간에 필사적인 공중전이 전개되었다.
지상전에 이어 죽고 죽이는 필살의 공중전이 전개된 것이다.
보급전이 성공하면 독일 일개 야전군단이 살아나고 실패하면 제 3제국 병력의 절반이 날아가 전체 전쟁에서 질수도 있었다.
이 때 맹활약한 전사들이 바로 “밤의 마녀들”이다.
그리고 그 중 LYLYA LYTVIAK이 제일 유명하다.



그녀의 애기와 같은 야크기 실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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