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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사무라이 |
| 이름 |
달빛노래 |
등록일 |
2009-12-09 오후 12:25:00 |
| e-m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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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국권을 찬탈할 당시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던 명성황후를
잔학무도하게 시해(弑害) 능멸했던 사무라이들은 단순한 자객(刺客)들이 아니었다.

원래 사무라이는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무사를 말하며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이후 셋칸케[攝關家:섭정과 관백벼슬을 하는 가문]와 잉[院]
등에서 경호를 전담하여 점차 특수한 집단으로 세력과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다.

1192년 가마쿠라[鎌倉]막부가 들어선 뒤 사무라이는 실질적인 지배집단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에도[江戶]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사농공상(士
農工商) 가운데 사(士)를 사무라이로 지정하여 사회적인 특권을 법으로 보장했다.
무사계급은 영주인 다이묘[大名]에게서 녹봉을 받으며 다이묘의 관할지역 안에서
행정과 사법의 직무를 맡았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무사가
아니라 해당 지역의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사회 엘리트 계층이었다. 사회특권층으로
많은 권리를 누리기도 했지만 평민의 모범이 되도록 생활 규범 또한 엄격했다.

사무라이는 성(姓)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평민이 잘못을 범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벨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특권층이 되기 위해 그들은 무술 뿐만 아니라 학문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었다.
철저한 무사도 교육과 혹독한 자기수양이 수반되었고 청빈생활을 해야만 했다.

1716년에 간행된 무사의 수양서 [하이쿠레]에는 '무사도란 죽을 시기와 장소를
발견 하는것'이라고 정의하고 '무사라는 자는 '언제나 죽을 각오를 해야한다'
'무사는 전장에 나가서 주군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는 자'라고 말했다.
또한 어느 번에서는 남자가 7~8세가 되면 그의 아버지가 '너의 주군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 라고 물어 '죽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게 했다고 한다.

 그들의 '주군 섬김'은 신앙으로 비화하여 천황은 신격화 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호전적인 사무라이 정신은 대외적으로는 많은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침략, 대만침공, 청일전쟁, 러일전쟁,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저질렀고
대내적으로는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암살
테러 습격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져 수많은 정치가가 자객에 의해 희생되었다.




문답부용(問答不用).. 오직 강한 힘만이 정의(正義)라고 믿었던 사무라이들..

그들은 주군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검소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으며
올바른 행동을 하였는지 항상 자신을 뒤돌아보고 명예가 훼손되었을 경우에는
사무라이의 명예를 위하여 반드시 스스로 할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주군을 위해 충성 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 상식 밖의 행위를
무사도라는 명분으로 거침없이 자행했는데 이러한 전통은 조선과 중국 등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점령지에서 무자비한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으며 태평양전쟁에서는
가미가제 특공대를 보내어 '천황폐하만세'를 부르며 이른바 옥쇄로 이어졌다.



조선독립군들이 무더기로 목이 잘려 효수된 참혹한 모습


덴노 헤이까 반자이~




일본군 장교가 된 조선인들은 이미 조선인이 아닌 사무라이들이다.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

さよなら。 사요나라~♪♬














고구려시조 고주몽의 후예이며 백제 무령왕의 직계후손 제125대 일본천황 아끼히토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후예이며 제54대 경명왕의 직계후손
제 5,6,7,8,9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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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등록일자 |
등록자 |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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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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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9 |
달빛노래 |
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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