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陳平)은 한(漢)고조 유방을 도와 오른 팔 역할을 하며 한 제국을 반석 위에 올린 사람으로 유방이 북벌(北伐)할 때는 무려 여섯번이나 기계(奇計)를 써서 유방을 구해 낸 인물로 한신(韓信),장량(張良),소하(蕭何)와 더불어 한(漢), 개국 4걸 중 한 사람이다.. 그를 유방에게 천거한 사람은 위나라 출신 무지(無知)였는데 한왕은 처음에 진평에게 도위참승전호군(都慰參乘典護軍)에 임명했다. 그러니까 주발(周勃)이 간했다. "진평은 집에 있을 때 형수와 간통했고,위 나라에서는 쓰이지 않아 초나라로 갔으나 역시 용납되지 않아 다시 우리에게 왔습니다. 진평으로 하여금 군사를 감독하게 하는 요직에 앉혔는데 장수들로부터 뇌물이나 받아 먹으면 어쩌시렵니까? 대왕은 깊이 살피십시오." 그래서 유방은 그를 추천한 무지를 불러 꾸짖었다. 그러자 무지가 대답했다. "제가 왕께 말씀드린 것은 그의 능력이요,왕께서 탓하시는 것은 그의 품행입니다. 설혹 미생(尾生),효기(孝己)의 행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성패를 판가름 하는 마당에 얼마먼큼이나 이익이 되겠습니까? 결코 왕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쓰실 여가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진평을 한 직급 더 올려 주었다. 그는 과연 그의 능력을 증명했다. 반면 우리가 다 아는 조선의 조광조(趙光祖)는 젊을 때부터 성인의 가르침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소년시절에도 집과 서당을 오갈 때 처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임금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펴서 보는 이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그러나 임금도 조광조를 크게 신임하다 점차 부담을 느끼고 훈구파 쪽으로 돌아 섰으며 마침내 기묘사화로 권력을 잃고 38세의 창창한 나이로 사약을 받고 그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끝났다. 우리는 백의 민족이라 그런지 유달리 흠 없는 사람,얼룩없는 사람, 도덕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도덕성은 평가의 한 요소일 뿐이지 그 전부는 아니다. 물론 진대제 장관이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55억짜리 년봉을 버리고 1억 짜리 장관을 할 때에는 명예를 탐했기 때문이며 명예를 탐하는 자라면 진작 아들 단속을 잘 했어야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간통자, 병역 면제자, 신용 불량자 중에서도 국정을 맡길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도 안 된다. ==UNQU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