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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사카여행/후기 2
이름   김영환 등록일   2015-05-26 오전 5:36:00
e-mail   ywhkim@rhilaw.com
내용
2015. 4.15-18 오사카/교토 여행 후기 2

1. 후기를 쓰는 이유

한뫼회 회원 26명은 4월 중순 2박 3일동안 일본 간사이 지방(오사카(大阪)/교토(京都)/고베(神戶))에 봄나들이를 하였다.

4월 16일 출국하여 4월 18일 입국하는 날까지 아래 일정 여행지를 가이드를 열심히 따라 다녔다. 그 동안의 소소한 우리들 뒷얘기는 ‘오사카 여행/우리들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2015. 5. 15. 후기에서 올린 적 있으나,

2박 3일 동안 교토, 오사카, 고베의 우리가 다녔던 그곳은 어떤 곳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이번 여행의 의미도 늘리고, 또 이들을 연결고리로 하여 지나간 추억을 들춤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어 그 일정대로 한번 되돌아 보기로 한다.

첫날(4.16. 목)
-오전: 김포공항에서 출국 - 간사이 공항으로 일본 입국
-오후: 청수사(淸水寺, 키요미즈데라), 금각사(金閣寺, 킨카쿠), 헤이안신궁(平安神宮,) 도톤보리/신사이바시

둘째날 (4.17. 금)
-오전: 후시미 미나리 다이샤(伏見 稻荷大社), 니조성(二条城)
-오후: 아라시야마(嵐山), 도톤보리/신사이바시

셋째날(4.18. 토)
-오전: 오사카성 (大阪城)
-오후: 고베시 하버랜드/모자이크 거리 관광, 오사카 근교의 천연 온천
간사이 공항 출국- 김포공항 입국

2. 첫째 날

첫째 방문지는 교토 답사의 1번지라는 청수사였다. 11시경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 입국 수속, 공항에서 교토로 이동 1시간쯤 이동했을까, 여기는 교토다. 그 동쪽에 있다는 청수사를 찾기 전에, 청수사도 식후경, 점심 먹으로 찾은 집은 미리 예약한 돈가스, 튀김 우동집이었고, 달달한 우동 국물과 시켜준 시원한 맥주 한잔이 좋았다. 밥과 깍두기는 무한 리필이 된다고 했던가. 오사카 출신이 알아듣는 말로 어떤 말을 내뱉으면 무한 리필이 된다고 했던가, 당시에는 외우겠다고 중얼중얼거린 적이 있는 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1) 키요미즈데라(淸水寺)

식후경으로 청수사를 찾았을 때는 2시경이었을 것이다. 교토 시내 동쪽 오토와산(音羽山) 중턱 언덕 위에 위치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천 년의 고도 경주 불국사에 비교되는 곳으로, 교토에 가면 반드시 둘러봐야 하는 곳이라고 들었던 곳이다. 가이드는 일본에서 제일 많은 사람이 찾는 곳으로 유명한 “교토 답사 1번지”라 했다.

절의 이름 청수사는 주변의 언덕에서 흐르는 폭포에서 유래되었다. 기요미즈[淸水]는 '성스러운 물'이라는 뜻이다.
절 밑에 있는 동네를 사하촌(寺下村) 이라고 하는데, 산 중턱 언덕에 있는 청수사로 향하는 사하촌의 중앙의 골목길 양 옆에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나중 청수사에서 되돌아 나오는 길에서 양 옆 가계를 살펴보았더니 길가에는 녹차와 관련된 다기와 아이스크림, 작은 부채들로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일본에서 제일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말답게, 청수사로 가고 오는 길에는 관광객으로 빼곡했다.

복잡한 골목길을 올라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를 찾아들면, 청수사라고 현판을 단 정문인 주황색 인왕문(仁王門, 니오문)이 반긴다. 이 문을 들어가며, 붐비는 사람 틈에 일행을 놓치지 않게 열심으로 발 걸음 한다. 직진하다 곧바로 왼쪽으로 돌면 주홍색의 25m높이의 건물인 3층탑(三層노, 산주노토)을 지난다. 매표를 하고, 그 때 가이드가 매표한 티켓을 받아 들고 찾은 곳이 특히 깍아지른 절벽 위에 돌출된 본당(本堂, 혼토)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본당은 개/보수 중으로 덮어져 씌어져 있어 전체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나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곳이 그 유명한 본당의 무대인 '기요미즈노부타이[淸水の舞台]'였는데, 처음에는 이곳이 절벽 위에 세워진 것을 몰랐다. 본당의 무대를 지나며 큰 방 내부의 큰 기둥만을 얼핏 보며 계속 걸어 나가다가 본당 아래 오토와노타키 (音羽の滝) 샘물이 있는 방향으로 내려가기는 하되, 물을 받으려는 줄은 서지 않기로 하고 동기들 몇 명이 함께 아래로 내려 섰을 때, 철봉이 가로, 세로, 높이로 얽힌 비계 모양으로, 큰 나무 기둥이 절벽에서 본당을 떠 받치고 있는 것을 보며 신기해 했던 기억이 난다.

본당은 높이가 15m나 되는 거대한 기둥 139개가 떠받치고 있는데, 절 전체에 걸쳐서 못을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여 유명하고, 본당의 무대에 올라서면 교토 시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또 본당 아래 저쪽에는 작은 3개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오토와노타키(音羽の滝) 샘물이 보이는데, 그 앞에는 국자를 들고 기다리는 긴 행렬이 보였다. 세 개의 물줄기는 각각 사랑, 건강, 지혜라나, 세 가지 중 두 가지까지는 욕심 내도 되지만 세 가지다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불운이 온다나, 우리는 재미 삼아 줄을 서볼까 마음을 내다가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아쉬움을 접고 발길을 돌리니 마음이 편했다.

이곳은 봄엔 벚꽃, 가을엔 알록달록한 단풍이 아름답다는데, 우리가 찾았을 때는 수양버들 벚꽃인가, 축 늘어진 가지에 홍매화를 연상케 하는 나무들 옆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던 모습들이 기억난다.
교토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이곳의 정문인 인왕문 앞, 찾아오고 떠나가는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 속에 곱게 기모노를 입은 젊은 소녀들이 보였고, 그 일행과 함께 모습을 담고 싶어하는 이승우 동기, 요청에 따라 스마톤폰으로 찰칵 찍긴 했으나 요령 있게 찍지 못해 피사체를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쉬워하든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가이드가 준 관광일정에는 기요미즈데라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설립되었다나. 778년에 나라에서 온 승려 엔친이 세운 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재물을 희사한 사람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쇼군으로 꼽히는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인데, 혼슈 북쪽 지방의 오랑캐라는 에미시(蝦夷) 정벌로 공을 세운 뒤, 자신의 아내 산후조리를 위하여 사슴을 잡으러 갔다가 발심하여 청수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도 도래인으로 간무천황을 도왔다나.

현재의 건물(본당?)은 1633년 3대 쇼군 도쿠카와 이에미쓰(德川家光)(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2대 쇼군 도쿠카와 히데테다(德川秀忠)의 아들)의 명령으로 재건된 것이라 했다.
현재 이 절에는 일본 국보로 지정된 본당을 비롯해 인왕문, 서문, 삼층탑, 종루 등 숱한 중요문화재가 있으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다.

2) 킨카쿠. 로쿠온지(金閣. 鹿苑寺)

먼저 본 청수사가 교토 시내 동쪽이라면 그 다음에 4시경에 들른 곳은 교토 북산에 있는 금각사였다. 정식 명칭은 로쿠온지(鹿苑寺)이지만 연못 옆에 세워진 금각은 2층과 3층에 옷 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히고, 그 널지붕 중앙 맨 위에는 길조로 불리는 황금색 봉황이 빛나고 있는데, 이런 금박 누각의 모습이 연못 수면에 대칭으로 드리워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광경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곳 금각에 부처님의 사리(뼈)를 모신 사리전이 있어 더 유명해진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부적을 받았는데, 그 뜻은 "여기 금각 사리전이 부적을 받은 자의 운을 열어 복을 불러들이고, 가정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것이었다. (金閣 舍利殿 御守護, 開運招福 招福發運 家內安田)

가이드 안내 팜플렛에는 킨카쿠를 중심으로 한 정원. 건축은 “극락정토를 이 세상에 표현했다”고 하여 고코마츠 천황(잇큐선사의 아버지)를 초대하기도 했다는 극찬의 표현이 있는 걸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계속된 남북조의 싸움을 종식시키고, 일본 천황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무로마치(室町)막부(1336-1573)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1358-1408)가 에토쿠 4년(1397년)에 사이온지 가문의 산장을 양도받아 별장으로 지었으나, 요시미츠의 유언에 따라 그 사후에 절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체 아름다운 연못과 금각 주변의 나무가 절묘하게 어울려져 있어, 한국의 비원을 떠올렸던 생각이 난다.

또 한가지, 600년이 넘었다는 측 늘어져 받침대로 바쳐둔 배모양을 본뜬 축 늘어진 소나무는 주육송(舟陸松)이라 적혀 있었던가. 땅 위에 있는 배란 뜻 일 듯, 많이 닮아있어 김문곤 동기와 한참 발걸음을 멈춘 곳이다.

이곳도 세계 문화유산이다. 1994년 지정됐다.

3) 헤이안(平安) 신궁

금각사 산책 길을 한 바퀴 돈 후 곧장 들른 곳이 헤이안 신궁이다. 795년에 헤이안(현재의 교토)으로 도읍을 옮긴, ‘헤이안 문화’의 창시자인 일본 역사에서 제50대 천황인 간무(桓武) 천황(781-806 재위)을 제사 지내기 위해 천도, 1100년을 기념해 1895년 창건되었다는데,

그 배경은, 1867년 도쿠가와 마지막 쇼군인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전격적으로 권력을 천황에게 넘기고, 역사에서 사라지자, 1868년 종전 명칭 “에도”가 “도쿄”로 바뀌며 새로운 수도로 천황도 거처를 옮기자, 종전까지 천년의 수도였던 교토는 졸지에 일개 지방도시로 전락되었고, 이에 크게 동요한 교토 사람을 무마하기 일환으로 경제 문화 산업부흥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라 한다.

헤이안 시대 왕궁의 형식을 본떠 만들었고, 주황색 기둥과 초록색의 기와와의 조화가 인상적이며, 그 옆에는 교토의 벚꽃 명소로 유명한 신엔 정원이 있다는데, 경내는 대운동장 만한 공터를 지나서 저만치 거리에 신궁 건물이 정좌하고 있었으나,

여기 왔다는 표시만 남기고 곧바로 되돌아 나가자는 가이드의 제안에 따라, 오사카로 떠나가기로 결정, 일행은 신궁 울타리에서 입구에서 몇 발자국 들어가지 않은 대운동장 자리에서 저 멀리 신궁을 배경으로 단체로 인증사진만 찍고 물러난 곳이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 식이었다고나 할까.

여담으로 간무천황의 어머니 다카노노니가사(高野新笠)는 백제 무령왕(武寧王, 501-523 재위)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일본 천황의 피 속에는 한국인의 피도 섞여 있느니 어떻고 저떻고 하는 말이 이렇게 해서 나오는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신을 모신 곳을 신사(神社)라 하고, 특별한 신을 모신 곳을 신궁(神宮)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다이샤(大社)가 붙는 경우는 그 중에서도 격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익일 오전에 천개의 도리가 세워져 있어 장관을 이루었던 센본도리(千本鳥居) 산길을 걸었던 그곳, 후시미 이나리 다이샤(伏見 稻荷 大社)가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일본 전국에는 이나리 신사(여우신사가) 6만개나 되며, 이곳 쿄토 후시미 이나리 다이샤가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나.

3. 둘째 날

전날 자기 전에 우리는 임병호 총무의 방에 모여 캔 맥주 한잔을 더 했었다. 아침 식사는 7시부터 9시까지 일층 로비 오른 쪽(호텔 정문의 왼쪽) 식당에서 부폐식, 버스는 9시에 출발이라 하니 여유 있는 아침 시간이다. 주변의 아침공기를 마시러 호텔을 나서 전날 저녁 생맥주를 마셨던 곳의 방향으로 발을 옮겨 본다. 10분도 채 못 걸어 비가 우두둑 뿌리기 시작한다. 급히 호텔로 돌아와 식당에 들어가니 몇 분의 얼굴이 보였다. 빵과 베이컨, 달걀 후라이 등으로 간단식 아메리칸 브렉퍼스트식으로 해결,

버스 출발 9시 예정, 아침 식사를 7시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일찍 식사를 마친 동기가 방으로 되돌아가다 자기보다 조금 늦게 아침 먹으로 내려오는 동기 부부를 엘리베이트에서 만나면, 인사말이 달라진다. 경괘한 말 “좋은 아침”, “굿 모닝”이 아니라, “긴(기이인) 밤(바아암) 잘(자아알) 주무셨어요”라고 늘어진 긴말로 바뀌는 것이다. 두 분 부부, 즐거운 시간(雲雨之情을 나눔)을 보내느라, 늦게 자서 늦게 일어나신 거냐고 말을 비튼다. “그래 잘 잤다” 하고 정면으로 받아 치며 다 같이 웃는 동기들이다.

잠시 식사 후 바깥에 다시 나와보니 그것은 지나가는 비였고, 바닥만 약간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하늘과 공기는 다시 맑아져 있었다. 그 하루 날씨 좋은 날이 되었고, 나중에는 중국의 미세 먼지는 한국이 막아 주어 일본이 덕을 본다는 가이드의 말도 나왔다.

1) 교토 후시미 이나리 다이샤(景都 伏見 稻荷大社)

9시경 신오사카 호텔에서 교토로 출발, 무슨 야쿠자 아파트 촌 근처라 했던가, 버스를 내리니 주변에 수학여행을 남녀 중학생인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바글거린다. 근처에 후시미이나리 역이 있었던 것 같고.

당일 첫 방문지는 후시미이나리 다이샤 신사다. 일정에는 없지만 가이드가 좋은 곳을 안내한다면서, 이곳은 영화 ‘게이샤의 추억’의 주인공이 어릴 때 뛰어 놀던 촬영장소였다나.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나, 입장료는 없고, 24시간 개방하며,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가이드 ‘정짱’을 따라 열심히 발걸음, 곧이어 기둥 문이라고 할 높이선 주황색 도리(鳥居)를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국자로 물을 받아 손을 씻는 곳에 사람들이 줄 서 있다. 손을 씻고 입을 헹구어 예를 갖춤이 경내 들러보기의 시작인 모양이다.

바로 직전의 정문 옆에는 높은 대위에 검은 여우상이 있었고, 목에는 붉은 턱받침을 두르고 입에 물고 있던 것은 곡식 창고 열쇠라고 했던가, 여우는 일본 말로 이나리, 이나리는 ‘곡식을 맡은 신, 일종의 재물 신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은 사업의 번창함을 기원한다나, 일본 전국에는 이나리 신사(여우신사가) 6만개나 되며, 이곳 쿄토 후시미 이나리다이샤가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나.

우리는 여우하면 구미호를 연상하듯이 교활한 것의 상징처럼 느끼나, 일본에서는 친근함과 번창함의 상징으로 본다니 이것 다 문화 차이일 것이다. 우리가 까치를 길조로, 까마귀를 흉조로 아는데, 일본에서는 까마귀를 길조로 알고, 맛있는 요리로도 즐긴다고 하니 그것 다 문화의 차이다.

삼성동 봉은사를 연상시켰던 그 크기의 중앙의 건물이 본당이었을까. 온통 주홍색이 전면으로 나타나, 산뜻, 화려한 점은 있었지만 진중한 맛이 나지 않아 뭔가 허전함을 주었던 것일까, 그 좌측에 낮은 단층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 앞에 진열되어 수없이 많이 달린 줄지어 달려있던 것은 손바닥 크기의 幵(견)자를 닮은 작은 도리들이었다. 이 또한 염원을 담은 나무 액자라는 에마(繪馬)의 일종이었던가. 이들을 두리번거리면서 앞서 가는 우리 일행의 뒷모습을 열심히 따라다녔다.

여기의 명물은 센본도리(千本鳥居)로 산길을 따라 천 개나 세워 져 있는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인 데, 굳이 사진을 보지 않더라도 幵(견)자 모양의 도리가 일천 개가 줄 서있는, 幵 幵 幵 幵….도리가 늘어서 숲을 이루고, 그 터널 속으로 이동한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장관이겠느냐, 이곳을 다 둘러 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나, 넉넉치 못한 시간과 가이드가 지정한 시간, 언제까지 주차장의 버스까지 오라는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시간에 신경 쓰면서, 열심히 두리번거리면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걸었다. 크고 작은 주홍 색으로 칠한 긴 도리 터널을 지나면서 인간 세상과 뭔가 다른 세상에 잠시 머물렀음을 느꼈다.

하늘과의 교감을 의미하는 도리는 우리의 솟대 문화와 비교되는 것으로, 신의 세계에 들어감을 뜻하나, 이곳 도리에는 奉納(봉납)이라고 적혀 있어 기부로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큰 것은 수 억원에서 작은 것은 수 천만원의 시주를 받아 세워진 도리가 줄을 서 있었다.

김 회장을 따라 도리가 계속 이어진 산길을 서서히 올라 가다가 2/3쯤 올랐을까. 시내 전망이 보이는 곳에서 멈추어 되돌아 선 반환점이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근기에 따라 그곳보다 좀 더 멀리 오른 자도 있었을 것이고 거기까지도 안가고 먼저 돌아 선자도 있었을 것이다. 되돌아 내려 가는 길에는 2개의 길로 나누어 졌고, 잠시 주저하다가 김용휴 회장과 이원근 동기가 가는 다른 길을 따르기로 했다. 문제없을까 하는 약간의 의심도 없지는 않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회장이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나. 바삐 다 내려와 버스 정류장으로 왔으나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선물 가계도 들어가 보며, 여유가 있으나 마음이 편했다.

2) 니조성(二条城)

교토 남쪽에 있는 낮은 산 기슭에 있는 후시미이나리 다이샤를 둘러본 후에 찾은 곳은 교토의 중심지에 있는 니조성이다. 안내 팜플렛에 의하면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기반을 둔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교토에서 머물 숙소로 이용하기 위해 세운 성이다. 1603년 니조성이 완성되자 3월에 쇼군에 오르는 예식을 행하고, 2년 뒤 1605년에는 아들 히데타다(德川秀忠)가 이곳에서 제2대 쇼군에 오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말하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을 먼저 말해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금 KBS에서 방영하고 있는 징비록에 나오듯이,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켰던 문약한 조선 중기의 조선을 짓밟게 만들었던 그는 조선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으로 봐서는 100년간 300명의 군웅이 할거했던 혼란의 전국(戰國)을 통일한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1598년 병사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때 병사들을 출군시키지 않아 힘을 키울수 잇었던 그는, 1600년 반대세력인 서군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등의 연합군과 17만명의 최대전투인 세키가하라(関ヶ原)전투에서 천하의 주인을 정하는 최후의 결전에서 승기를 잡았다. 그런 이에야스가 1603년 쇼군에 올라 에도(江戶) 막부를 연 것이다. 또 이에야스는 이제 남은 것은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세력뿐이었지만 호코지 동종의 명문을 빌미 삼아 1614년과 1615년의 두 차례 전투 끝에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명실상부한 천하의 통일을 완성한다. 이점은 오사카 성을 방문했을때 2015년은 오사카 여름 전투의 1615년으로부터 400주년임을 표시한 깃대를 본 것도 이것에 기인한 것이다.

1624년에는 3대 쇼군인 이에미츠(德川家光)가 천황의 행차를 맞기 위해 혼마로고덴과 천수각을 세우게 되는데 이때가 니조성의 전성기이고, 한편 이곳은 1867년 도쿠가와 막부의 최후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넘기는 대정봉환을 선언한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둘러본 곳은 니노마루 궁전(二之丸御殿)과 니로마루 정원(二之丸庭園)이었는데, 니노마루 궁전(고덴, 御殿)은 북도와 연결된 6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6개 궁전 건물)은 연결되어 1,000평의 건물면적에 33개의 방에 800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다고 하는 곳이다.

우리가 신발을 벗고 복도 길을 앞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또 오른 쪽으로 직각으로 꺾어 직진하다가 왼쪽으로, 이런 식으로 신발을 벗은 출발점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현관, 가신 대기실, 공식 응접실, 셋째 거실, 첫째 둘째 거실, 내부 알현실, 쇼군 거처, 넷째 거실, 각료사무실, 사신거처로 왼쪽으로 돌면서 둘러 보았던 곳이다. 이 중 거실은 오히로마(大廣間, 아주 넓은 방)은 쇼군이 다이묘의 방문을 받던 곳이라 한다. 수학 여행 온 일본 학생들과 외국인 들이 무리 지어 함께 돌고 있었다. 적의 침입을 알 수 있도록 바닥을 밟으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우구이스바라(휘파람새마루)라고 하였다.

니노마루 궁전의 복도를 나와 제일 먼저 본 것은 정원이었다. 일본 정원의 명장인 ‘고보리 엔슈’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모사한 츠키야마린센(築山林泉)식으로 아름답게 만들었으며, 안에 섬이 3개 있고, 서로 다리로 연결되어 상호 통할 수 있어 지천회유(池泉回遊)식으로 분류한다나. 이 연못에 연꽃은 안 보이네 라고 한 동기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직 꽃필 때가 안되었는가? 처음부터 연꽃 종류는 없었던 건가.

마지막으로 잘 꾸며진 잔디밭에 여러 종류의 나무로 꾸며진 것은 세이루엔(淸流園)이라는 서양식 정원이었다. 이곳의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린다. 관심 있게 둘러보며 뒤처져 오던 동기들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따스한 햇볕을 즐겼던 곳이다. 입구로 향하는 우리들 앞에 펼쳐진 정원에는 수양버들 벚꽃이 곳곳에 피어 늘어져 있어 시선을 끌었던 곳이고, 서양 사람들도 이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었다. 나도 집 사람과 버들 벚꽃을 을 스마트 폰에 영상을 남겼다. 이 또한 나의 발자취니까.


3) 일본인 선호 1위 아라시야마(嵐山)

이조성을 보고나니 점심 때, 1시는 지났다. 다음은 교토의 서북쪽에 있는 아라시야마로 가서 식사를 한다나, 그곳에 도착하여 버스 정류장 옆의 2층 식당 ‘레스토랑 아라시야마’에 오르니, 아마도 200명은 들어갈 만한 큰 홀의 좌석은 손님들로 빼곡해 바둑판의 2/3가 가득 찬 듯 했다. 아,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을 찾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 냄비에 부어 끓여 먹는 수제 두부 요리 점심은 별미/담백했다고나 할까,

식후 곧바로 산책에 나선다. 이곳은 일본인이면 누구나 와보고 싶어하는 곳이란다. 봄의 벚꽃,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등, 사계절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다나. 유유히 흐르는 호츠강, 달이 다리를 걷는다는 도게츠다리 강변 풍경,

식후 일행은 주변에 있는 관광명소 세계유산 텐류지(天龍寺)를 건너뛰고, 노노미야 신사(野宮神社)를 기점으로 한 바퀴 돈다. 이곳은 인연을 맺어주고, 자녀를 갖게 해주며, 학업의 신을 모시고 있는 곳이라서 연인과 함께 하면 좋은 곳이라나, 삼삼오오 흩어진다. 이곳을 시계의 6시의 기점으로 직진하니 그 유명한 소위 치쿠린(竹林의 径) (죽림의 길)이 나타난다. 대나무는 팔뚝보다 더 굷다. 20m보다 더 높은 듯, 쭉쭉 빵빵 뻗은 대나무 숲이다. 말만 들은 담양의 죽림원은 어떤 곳일까 하는 생각이 났었다.

대나무 숲을 지나 계속 직진하자 소 도로 한참 아래로 가로지른 철도 길이 지나고 있었고, 조금 더 지나 소창지(小倉池)라는 연못이 보였고, 여기서 왔던길 되돌아 가는 팀과 곧장 앞길로 가는팀 두 팀으로 나뉘어 졌고, 직진 팀에는, 이진권 동기가 앞장서며, 3시 방향으로 동행을 강요한다. 아라시야마토롯코 역이 곧 바로 앞에 보였고, 식당에서 들고 나온 산책 약도로 방향 감각을 잡으며 걷는다.

어느 길가에 조용한 공터의 땅이 나타났을 때다. 이진권 동기가 번개처럼 떠오른 사업구상을 얘기한다, 김성기 동기에게 제시한 사업 제안은 여기 땅을 같이 사서 별장을 지으면 좋겠다나 뭐라나, 기상천외다. 멋진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다. 이진권 동기는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이라는 것은 나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기는 마음이 젊은 청년이다

농담도 하며, 주변의 푸릇푸릇한 나무 잎 색깔, 피어 있는 꽃송이를 보면서, 걷는 산책 길에 마음조차 한가롭다. 오중관 동기, 골목 길가의 명물로 자리잡은 녹차 아이스크림 콘을 사더니 일행에게 하나씩 안겨준다. 동기 덕분에 감사하게도 그곳에서 혀가 달달, 살살 녹아 시원한 맛, 녹차 맛/색 아이스 크림을 맛보게 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노노미야신사 근처에 원점 회귀 했을 때, 그곳 주변에는 자전거를 빌려주는 있응데 그 요금이 하루에 100엔 정도였나. 이곳 좁은 지역에서 한 시간이면 모르되 하루를 빌려 자전거 탈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빌려주고 100엔이라면 그것도 손해는 아니겠다며, 소설을 쓰며 같이 고개 끄덕 했었다. 또 젊은이 들이 인력거를 끌고 나가는 광경을 보고, 비록 돈을 준다고 하지만 자기의 호사를 위해 사람을 부려먹는 것이라며 인력거 운행에 마음을 불편해하던 오중관 동기의 말이 다가왔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일급수가 흐르고 200년, 300년된 가옥이 볼 수 있다던 나무로 만든 도게츠다리(渡月橋) 건너간다. 신경철 동기와 건너가니 앞팀 들은 이미 이곳에 들러보고 다리를 건너온다. 맑은 강물, 강가의 푸른 나무와 벚꽃이 남아 있었고, 산허리에 푸름을 띈 맑은 연녹색이 곱다. 최정태 동기가 올렸다는 사진에 올라온 아라시야마의 봄 풍경은 절정이고 맑고 깨끗하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남는다. 그러니 이곳이 가장 오고파/가고파 포근한 동네 일리라.

4. 세째 날

1) 오사카성(大阪城)

오사카성은 구마모토성, 나고야 성과 함께 일본 3대성의 하나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쇼군 시대를 지켜본 오사카성은 오사카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천하통일 직전 심복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배신을 당하여 자결한 후, 그 후계자가 되어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오다 노부나가가 1580년 초토화 시킨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 절터에 1583년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하였고, 2년 후에 천수각(天守閣)을 완성, 천하통일을 이룬 히데요시를 상징하는 크다란 성곽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1598년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기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격파하고, 1603년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德川) 가문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도쿠가와 가문인 에도 막부가 도요토미 가문을 쓰러뜨리기 위해 벌린 전쟁인 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오사카성(大阪城)은 함락되었고, 천수각은 불타버리고, 히데요시의 아들인 토요토미 히데요리 마져 자살로 도오토미 가문은 멸망하였다. 때마침 우리가 오사카성을 들어가 천수각으로 향하는 길에는 올해 2015년은 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 400년 되는 해로 표시한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태정대신에 임명된 다음해 1616년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지만 그 자손에 의해 에도막부는 계속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아들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는 정권이 교체된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1620년 명령을 내려 더 크게 전면 재축(1620년 수리 이후 1631 년 복원)하였으나, 천수각(天守閣, 덴슈가쿠)은 1665년 낙뢰 때문에 또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오사카성은 에도(江戶)시대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의 서 일본지배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가 막부가 멸망한 1868년 전란 중에 소실되었다.

이번에 우리가 본 근대 오사카성 천수각은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에 의해 현대의 천수각이 완성되었다. 계속적인 보수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데, 천수각과 벚꽃이 잘 어울렸는지 천수각의 티켓에도 벚꽃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고, 근처에 벚꽃이 많아 사쿠라몬(桜門)이라 불리고 있고, 여기를 지나면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벽을 만났던 기억이 날것이다. 우리가 찾았던 4월 18일에는 겹 벚꽃이 남아 있었다.

천수각은 지상 55m의 전망대에서는 오사카 거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밖에서 보면 5층이나 안에서는 8층으로 되어있고, 우리는 엘리베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층계 계단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올랐다가 내려왔던 온몸으로 부딪쳐 느꼈다.

이 때 같이 걸음하며 보였든 분은 김용휴, 임병호, 이원근, 이승우, 이대용 부부, 김성기, 최연식 동기 등이다. 맨 위층 전망대에서 오사카 시내와 오사카 성의 해자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한 계단식 내려오며 층층마다 전시된 전시물을 본 것은 어렴풋하다. 4층 쯤일까, 황금으로 된 잉어용일까, 그 배경으로 임병호 총무, 최연식 동기와 같이 찰가닥 한 것이 핸드폰에 남아 있다.

전국시대 세 영웅 이야기

이번 방문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한 니조성 축성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오사카 성의 축성의 배경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렴풋이나 일본 역사의 한 부분, 그 중에서도 상식적으로 많이 들어 알고 있는 특히 전국시대 세 영웅도 생각해보는 기회도 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소설 ‘대망’을 통해 대충 그 역할이나 성격을 알고 있는 일본 전국시대의 3대 인물로 꼽는 1)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2) 도요토미 히데요시(風信秀吉), 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한번 더 보면 그렇다.

오다가 전국시대(1469-1573) 100여 년의 혼란을 종식하는 통일의 가닥을 잡은 사람이라면, 도요토미는 그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하고 일본 통일을 이룩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세력을 물리치고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돼 264년간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를 열었다.

그래서 천하라는 떡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데, “오다가 반죽하고, 토요토미가 찐 떡을 기다리고 있던 도쿠카와가 먹었다” 고 요약한다, 즉, 일본 통일의 기초를 오다 노부나가가 닦고, 이어받은 토요토미가 천하를 통일하는 듯 했으나 실제로 오랜 번영을 누린 것은 이에야스라는 뜻이다.

또 한편 세 사람의 성격을 말해주는 “울지 않는 두견새”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들어와 알고 있는 이야기다.

‘오다’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필요 없으니 칼로 베어 죽여버리겠다’ 고 할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도요토미’는 ‘울지 않으면 어떻게 던 울게 만들겠다’고 하는 꾀가 많은 인물이고,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여 인내심의 소유자임을 알게 한다.는 세 영웅들의 이야기를 한번 더 반복해보며,

2)고베시 하버랜드/모자이크 거리 관광, 오사카 근교의 천연 온천, 귀국

오후는 세계적인 미항 고베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한신 대지진의 잔해를 둘러본 후다. 고베의 명소라는 하버랜드/모자이크 거리에서 쇼핑몰을 대충 돌고, 2층에서 바다를 내려보며 망중한의 한나절을 보낸 숙제를 다 마친 자의 여유로움이었을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 근처의 온천 집에 들러서 더운 온천수에 몸을 풀며, 열심히 걸어 준 우리 몸에 대한 선물이었을까, 이제 모든 일정은 무사히 마쳤고, 간사이 공항에서 회장단이 마련해준 과자 보따리 하나씩 들고 김포국제 공항에 안착했고, 2015년도 해외 여행은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 되었다.

5. 마무리 말

이번 교토/오사카/고베 여행을 통하여 간사이의 역사와 문화를 희미하게나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다녀온 곳의 지명이든 장소든 그 이름이 어떤 형식으로던 들려오거나 보여지면 더 관심이 주어지고 내 안에서 되새김질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든 장소든 나와 만난 모든 것은 소중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처럼, 우리가 찾았던 곳의 이름을 한번 더 찾고, 생각하는 만큼 우리의 뇌리 속 꽃이 되어 추억으로 아로새겨질 것으로 믿으며,


(이번 글은 현지의 안내 팜플렛과 조관희의 ‘교토, 천년의 시간을 걷다’을 참조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해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동기님들.

2015. 5.26.

50회 동기 김영환


2015.4.16-18, 오사카 여행 참가자(26명)

김문곤(이국향),김성기(정선희),김영환(송희숙),김종원(유순영),신경철(최영숙)
전희식(김영옥),최정태(박상임),이대용(윤영순),최연식(나영화),구상교,김용휴,
박창기,오중관,이승우,이원근,이진권,임병호




[나도 한마디]
서대교  5/15 ~6/17 베낭 메고 커리어 끌고 크로스 도 걸치고 동가식 서가숙하다가 메르슨지 며르친지 때문에 들어오기 진짜 싫었는데......ㅠㅠ. 하여 늦게 글 올려 죄쏭!! 2015-06-26 오후 12:05:00 x

서대교  영환이 친구 덕분에 일본 구경을 컴피러 앞에서 편하게 잘 했씀다요.ㅎㅎ감쏴!! 2015-06-26 오후 12:02:00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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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여행/후기 2 2015-05-26 김영환 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