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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속의 태극기
작성자 열린마음 게재일 2011-06-17
내용
역사속의 태극기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만주에서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태극단'이
결성된다. 이렇게 태극기는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이름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해외에 선전하는 책자 등에 인쇄되고, 독립군들으 진군기 등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3.1운동 직후 미주지역에서는 한인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기도 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고 임시정부 청사 회의실에 쌍태극기를 꽂아 놓기도 하였다.

1932년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고 일왕의 생일 축하식이 거행되는 상해 홍커우
공원(虹口公園), 現노신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 매헌 윤봉길 의사도 그렇고,
역시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도 그렇고,
모두들 한결 같이 태극기 앞에 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결사 항전을 다짐하였다.
일제 감정기 독립운동에서 쓰인 태극기엔 애국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간절한
광복의 염원이 담겨 있다.


불원복 태극기

전남 구례군의 고광순(1848∼1907) 의병대장이 항일운동을 하면서 사용한
태극기이다. 태극기 위에 "불원복(不遠復)" 즉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고
써 넣은 글씨에서 알수 있듯이 항일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진관사 태극기

태극기는 독립신문류를 감싼 채로 발견되었는데, 규격은 가로 89cm, 세로
70cm의 면직물에 재봉틀로 바느질되어 있으며 중앙에 약 32cm 직경의 태극문양,
네 귀에 건·곤·감·리의 4괘가 갖추어져 있다. 4괘의 위치가 1942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양식의 4괘와 동일하나 현재의 태극기와는 위치가
다르게 그려져 있어서 태극기 변천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불교계 독립
운동의 중요한 사례로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안중근 혈서 태극엽서

항일운동가 안중근( 1879∼1910 )은 어느때고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겠다며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4괘 대신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쓴 태극엽서를 손수
만들었다. 결국은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하므로써
독립의지를 실천하였다. 1910년 3월 26일 10일 중국 여순 감옥에서 일본에
의해 사형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항일정신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
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태극기

1923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크기는 193cmx151cm이며, 4괘와
청홍방(음.양) 배치가 현재의 태극기와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임시정부 제23주년 3·1절선언시 태극기에 대한 뼈저린 필요성을 강조
하고 독립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집집마다 태극기 한장씩
을 꼭 준비해 걸어 놓도록 했다.
사진